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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악은 나와 세상 사이에 깃든다

등록 2017-03-30 20:23수정 2017-03-30 20:36

재일 학자 강상중 ‘악의 힘’ 분석
일상의 악에서 자본주의 비판까지
“악의 연쇄를 인간적 연쇄로”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
강상중지음, 노수경 옮김/사계절·1만1500원

<고민하는 힘> <살아야 하는 이유> 등의 저서로 한일 양국에서 많은 독자를 사로잡은 재일동포 지식인 강상중(67)이 새 책을 선보였다.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의 일본어판 원제는 <악의 힘>(2015).

촛불 이미지를 담은 표지의 한국어판에서 강상중은 서문 첫 문장부터 직설했다. “악이란, 악의 힘이란 과연 무엇일까? 지금 이 물음이 가장 절실하게 다가오는 곳은 바로 한국이 아닐까 한다.” 그는 한국이 소수 권력자, 파워 엘리트, 한 줌의 재벌에 잠식되었고 오랫동안 “악의 힘”에 지배당했다고 썼다. 그러나 이 ‘진부한 악’ 앞에 국민이 포기하지 않았다며 “한국이 빛나 보이는 이유”도 밝혔다. “악을 응시하며 다시 한번 새로운 민주화를 향한 행보에 나섰기 때문이다.” 촛불집회와 대통령 파면 이후 출판사와 지은이가 협의하여 한국어판 제목을 바꾼 까닭이기도 하다.

전작들에서 대재앙과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상실, 불안, 정체성 위기 등을 꾸준히 다뤄온 그는 이 책에서 역사와 일상 속의 크고 작은 ‘악의 힘’을 검토한다. 책을 쓰게 된 이유도 기독교계 대학 총장으로 부임한 뒤 학교 개혁에 착수했다가 1년 만에 역공을 당해 돌연 학교를 떠나게 된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의 언동을 보며 제 안에서 악이란 주제가 떠올랐다”고 그는 적었다.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꼈을까. 그러나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에 머물지 않았고, ‘악’에 대한 사유를 끝까지 밀어 붙여 증오의 이면에 숨은 ‘공감의 회로’를 찾았다. 180여쪽의 얇고 가벼운 이 책은 이로써 세상에 가득한 악의에 대한 가장 통렬한 복수, 확실한 보복이 되었다.

엽기적인 살인사건들, 이슬람국가(IS)의 테러, 종교와 일본문학, 서구문학에서 재현된 갖가지 악을 분석한 끝에, 지은이는 ‘악’이 특정인의 광기나 악령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자유의지가 있으나 불안하고 공허한 느낌을 갖는 사회적 인간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들러붙을 수 있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악은 절망감, 증오, 거절당한 느낌, 허무의 심연, 나와 세상의 골 사이에 싹튼다는 것이다. 인터넷상의 혐오발언, 헤어진 연인에 대한 보복으로 개인촬영물을 유포하는 성범죄 ‘리벤지 포르노’에 악은 깃든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타인의 불행은 꿀맛), ‘꼴 좋다!’(고소하다)는 쾌재의 웃음 속에 악이 숨쉰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 평범한 직장에도 ‘익명의 악’이 잠행한다. 불순한 것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은 종교원리주의, 국가원리주의 같은 “천박한 원리주의” “반지성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특정 인종, 민족, 소수자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와 세계적인 극우 반동의 흐름을 우려하는 것으로 읽힌다.

재일학자 강상중은 “악의 연쇄”를 “인간적 연쇄”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사계절 제공
재일학자 강상중은 “악의 연쇄”를 “인간적 연쇄”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사계절 제공
인류사에서도 “죽음의 욕동”이 난무한 지난 100년이었거니와, 불공정한 현대 자본주의는 “악과의 거래”로서 쌓아올린 시스템이라고 지은이는 갈파했다. 격차와 빈곤을 만드는 자본주의의 한가운데, 허무에서 방출된 파괴 충동이 사로잡을 때 테러리즘으로 치닫는 사람들이 나온다. 세상에 단절돼 떨어져 나가는 이들이 늘어나는 한, 악의 연쇄는 멈추지 않는다. “안심할 수 있고 안전하다는 느낌이 충만한 사회, 공정함이 비교적 보장되는 사회, 자유가 널리 퍼진 사회”(안전, 정의, 자유)가 ‘죽음의 충동’에서 벗어난 ‘생의 충동’을 만들어낸다는 얘기다.

비판적 지식인 강상중의 글에서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비판하며 지적 권위를 높이려는 자기기만을 발견하기 힘들다. 이번에도 지은이는 스스로 성찰하며 현실과 눈높이를 맞추고 ‘악’의 문제를 ‘우리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자고 제안한다. 공허함, 존재의 불안, ‘철저한 결여’라는 감정의 뿌리는 모든 이가 공유하는 것이고 증오의 에너지 속에는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은 절절한 마음도 함께하는 것이니 “악의 연쇄”를 “인간적인 연쇄”로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종합하면, 악은 ‘관계의 결여가 낳은 병’이다. ‘용서할 수 없다’는 감정의 연대는 오히려 서로 이어져있음을 알게 한다. 절망 속에서도 타자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타자의 아픔을 느끼며 일시적 공감이라도 얻을 때 사람은 스스로 세상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낄 수 있다. “내가 나를 뛰어넘는 어떤 존재와 이어져있음을 확신”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악의 시대를 건널 힘을 얻는다.

이 책은 한일 양국 사이에서 정체성을 고민하는 젊은 날을 보내고 대재앙과 아들의 때 이른 죽음, 동료의 외면 등 삶의 격동을 겪으며 구도하듯 화두를 붙잡은 한 지식인의 보고서다. 극단적인 악행부터 얼굴 없는 진부한 악까지 수많은 악이 입을 쫑긋거리는 세상에 던지는 구조 신호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사계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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