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주체 -라캉 정신분석과 한국 정치의 단층들
신병식 지음/도서출판비·2만8000원
무의식을 중심으로 개인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것으로 시작한 ‘정신분석’은 자크 라캉(1901~81)의 연구를 발판으로 사회 분석에도 널리 퍼졌다.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의 작업은 현실 세계를 분석하는 데 라캉의 정신분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온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라캉의 정신분석은 “사회적 공유물로서의 언어가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결정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핵심은 주체의 형성과 주체를 지배하는 질서 사이의 관계다.
신병식 상지영서대 교수(정치학)는 <국가와 주체>에서 라캉의 정신분석을 한국 근현대사를 읽는 도구로 활용했다. 정치학자로서 “한국현대사를 주체의 차원에서 해명해보고자 하는 생각 때문에 정신분석에 관심을 갖게 된” 지은이가 그동안 발표했던 논문들을 책으로 묶었다. 주로 지제크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브루스 핑크 등 라캉 연구자들의 해설을 길잡이로 삼았다고 한다. 그 결과 박정희 시대와 이때 형성된 근대 주체의 성격, 일제강점기 혁명적 독립운동가들의 정체성 등을 정신분석으로 파헤친, 독특한 연구 성과가 나왔다.
라캉 정신분석에서 주체는 스스로 온전할 수 없으며, 어떤 상징적 질서(타자)에 의해 부여받은 ‘기표’로 대표되면서 자신을 형성한다. 여러 기표의 연쇄망 속에서 다른 기표들로부터 고립된 단 하나의 기표가 ‘주인 기표’(대타자)로서 주체를 대표하게 되는데, 주인 기표는 “무의식의 차원에서 주체를 독점적으로 지배”한다. 예컨대 주인 기표의 자리에 ‘우리 집 장손’이 들어서면, 주체는 무엇보다도 그것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데 전념하게 된다.
1969년 ‘병역미필자’에 대한 처리 방안을 의결한 대통령 결재 문서. ‘박정희 체제’는 ‘국방의 의무’를 신성화하고 징병제를 확립하기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국가기록원 소장.
박정희 체제의 경우 ‘주인 기표’는 ‘국방의 의무’였다. 박정희 정권은 새 병역법을 제정하면서 국방부 장관에게 군인이 아닌 민간인까지 관리할 권한을 부여했다. 병무청을 확대, 개편하고 군인의 일거수일투족까지 규율하는 세세한 ‘복무규율’을 만들었다. ‘국방의 의무’ 앞에는 ‘신성한’이란 수식어가 붙었고, ‘병역미필자’는 ‘병역기피자’, ‘병역사범’이 됐다. 군대뿐 아니라 생산현장 등 전 사회가 병영화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인 기표에는 “기의”, 곧 그 내용이 없다는 사실이다. 주인 기표는 다른 기표들로부터 고립된 채 그 내용에 대해 어떤 접근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독점적 지위를 획득한다. 때문에 주인 기표는 명시적으로 드러난 법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전 사회의 밑바닥을 불문율로 지배하는 무의식으로서 자리를 잡는다.
대신 주인 기표는 다른 기표들을 자신이 노예로 부리는 지식 체계(지제크 방식으로 말하자면 “교리로서의 이데올로기”)로서 표면에 내세운다. 박정희 체제의 경우 “경제성장”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주인의 유일한 관심사는 이를 통해 얻어지는 잉여, 곧 사회 전체에 무의식으로 자리 잡은 “무조건 명령, 무조건 복종”을 누리는 것뿐이다. 간단히 말해 ‘경제성장’을 박정희 체제를 대표하는 담론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이 체제의 실제 주인은 그 뒤에 숨은 “눈먼 권력의지”다. 폭력적 수단을 통해 ‘보다 덜 효율적이더라도 보다 더 순종적인’ 근대 주체를 단기간에 이루고자 했다는 점도 특징이다.
이밖에 지은이는 김근태·김병진·서승 등 과거 독재정권에서 고문을 겪고 간첩으로 조작당한 이들의 경험, 일제강점기 혁명적 독립운동가였던 김산과 조봉암이 겪은 정체성의 변화, 영화 <똥파리>에 나타난 용역깡패들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권력의 모습 등 다양한 주제들을 정신분석으로 풀이해본다.
1962년 1월5일,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주역들이 경제기획원에서 업무 보고를 받고 있다. 신병식 교수 제공.
지은이가 주로 관심을 기울이는 대목은 ‘명시적인 법’이 아니라 주체의 세세한 영역까지 들여다보는 ‘불문율’에 의해 주체가 길들여지는, 근대 권력과 주체 사이의 특징적 관계다. 근대 세계에서 주체는 법으로 대표되는 상징적 현실(‘상징계’)에 진입하며 나를 관찰하는 대타자를 만족(‘자아 이상’)시키려 노력한다. 그러나 엉성한 법의 뒤편(‘실재계’)에서 나(‘초자아’)는 온갖 욕망을 부추기지만 도저히 지켜낼 수는 없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촘촘한 ‘불문율’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초자아를 부추기는 욕망은 다름 아닌 타자, 곧 권력의 욕망”이다.
지은이는 “극히 사적이라 여겨지는 욕망의 영역까지 장악하여 개개인들을 ‘일 잘하고 말 잘 듣는 노동자’로 만들어내는 것”이 근대 권력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정신분석은 이처럼 압도적으로 불균형한 주체와 권력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는 새로운 정치를 고민하는 데 유용한 도구다. 지제크나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 등의 서구 급진 철학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사유의 젖줄 가운데 일부를 라캉의 정신분석에 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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