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경제 신화 해부-정책 없는 고도성장
박근호 지음, 김성칠 옮김/회화나무·2만원
1964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84달러였다. 일본의 8분의 1, 대만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그런 나라가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겪을 때까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초고속성장을 계속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박정희 정부의 수출 지향형 산업화 정책’에 그 공을 돌린다. 한 걸음 더 나가 ‘개발을 위해 독재가 필요했다’는 논리를 펴는 이들도 많다.
박근호 일본 시즈오카대학 교수가 최근 펴낸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정책없는 고도성장>은 이런 주장을 ‘신화’라고 일축한다. 그는 1993년 <한국의 경제발전과 베트남 전쟁>이란 책을 펴낸 바 있다. 베트남 전쟁으로 한국을 둘러싼 국제환경이 변화하고, 베트남 특수가 일어난 것이 한국 경제의 비약을 가능하게 한 직접적인 동인이라는 견해를 제시한 책이다. 그 속편 격인 이번 책에서 박 교수는 비밀 해제된 박정희 정부 시절의 기록물과 미국의 공문서를 분석해, 한국의 고도 성장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구실을 재검토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린다.
“한국 정부는 특기인 태권도, 레슬링, 유도, 양궁, 복싱 등 종목에서 (5개의) 금메달을 기대하고 이들 종목을 집중 육성했지만, 중점적으로 육성한 종목에서는 금메달을 따지 못하고 오히려 축구나 육상, 수영, 승마, 농구, 요트 등 예상 밖의 종목들에서 6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인근에 서 있는 높이 5m에 이르는 대형 동상. 구미/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한국 경제의 도약이 박정희 정부 정책의 성과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가 급조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66년)은 ‘자본 부족’ 탓에 파행을 겪고 목표를 낮췄다. 그 뒤 수출확대정책도 목표와 결과 사이에 인과관계가 잘 성립하지 않는다고 박 교수는 지적한다. 박정희 정부는 ‘자립경제’를 내세웠으나 자금조달에서 대외의존은 더 심화됐고, 수출 상품의 다양화를 지향했지만, 미국으로 가는 일부 품목으로 집중도가 더 높아졌다. 박 교수는 그래서 ‘정책 없는 고도성장’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한국 경제 도약의 배경으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한국 전략의 변화를 꼽는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이전까지는 한국을 일본의 방파제로 삼았으나, 그 뒤 “한국의 군사, 경제력을 강화하여 자립적인 완충지대”로 만들고,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자유주의 진영의 경제적 우위를 입증해줄 증거”로 삼기 위해 ‘한국 모델’을 성공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한국은 고성장을 시작했고, 그동안 미국의 지원이 집중됐던 인도는 정반대의 길로 접어들었다.
박 교수는 한국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성과를 거둔 것은 미국이 적극적으로 한국 상품을 사줬기 때문(‘바이 코리아 정책’)이라고 한다. 또 개발도상국에서는 매우 드물게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지식기반산업으로 성장한 것도 미국이 바텔기념연구소를 앞세워 파격적인 지원을 한 결과라고 본다. 미국은 ‘한국 모델’을 성공시키기 위해 박정희 군사정부의 장기 집권을 원했고, 지원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전투병력을 파병했다. 1972년 말께는 미군보다 지상군 잔류병력이 많았다. 사상자는 5천명이었다. 파병은 박정희 정부가 전쟁 특수를 노리고 미국에 먼저 제안했다. 파병에 따른 특수는 컸다. 하지만 그보다도 한국의 전략적 지위 변화가 한국 경제의 도약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했다는 게 이 책의 핵심이다. 그는 이를 ‘미국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박 교수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한국의 전략적 지위에 대한 미국의 판단은 1980년대 후반 다시 변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약 10년 뒤, 한국은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상황에 처했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