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노년은 아름다워- 새로운 미의 탄생>, 김영옥 지음, 서해문집, 2017
나는 ‘여성’이고 나이 들어 가고 있다. 이제 ‘나이 든 여성에 대한 혐오’가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아름답고 무엇을 추하다고 느끼는가. 그 느낌의 지각 구조는 사회적인 것이지만, 여성도 노인도 자기혐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노년은 아름다워- 새로운 미의 탄생>의 지은이 김영옥은 한국 사회에서 몇 안 되는 자기만의 문체를 가진 지식인이다. 베냐민, 카프카, 정신분석을 전공한 철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그녀는 노년과 고령화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와 함께 ‘부러운 노년’을 다룬다. 이 책은 저자가 최현숙, 최영선, 김담, 이영욱, 윤석남, ‘밀양 할매들’(작은 따옴표는 필자), 군지 마유미, 다지마 요코와 인연을 만들어가는 여정이다.
노년 담론 중 흔히 회자되는 논리가 “곱게 늙기”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나이 듦은 “곱지 않다”는 전제가 있다. 또한 아무리 ‘내면의 아름다움’이라 할지라도 곱게 늙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왜 노인에게만 곱게 살라고 하는가!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의 제목보다 부제에 방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미의 탄생”. 이 책의 주인공들은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치열하고 성실하게 사는 아름다운 개인일 뿐이다. 누구나 나이 들지만 나이 듦의 형태는 획일적이지 않다. 모든 범주가 그렇듯, 어떤 면에서는 ‘노인’과 ‘젊은이’의 차이보다 노인간 삶의 차이가 더 클지도 모른다.
우리가 체화하지 못해서 그렇지, 나이 듦의 의미는 간명하다. “부담되고 인정하기 싫은, 심지어 공포로까지 확산되는 노년의 이미지는 근대주의가 퍼뜨린 독립적 개인에 대한 신화, 뷰티산업에 토대를 둔 편협한 미의식 그리고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화적 현상이다.”(275쪽) 물론 나이 듦이 동반하는 신체 현상(체력 저하, 노안, 머리숱 빠짐…)은 ‘어쩔 수 없다’.
한국 사회보다 먼저 고령화를 겪었고 사회적 논의도 풍부한 일본. 내가 가본 도시 교토는 노년들로 넘쳐났다. 이는 노인이 많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거리를 안전하게 활보할 수 있다. 노인 인구가 가시화될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는 것이다.
좋은 글귀가 촘촘한 책이지만, 나를 사로잡은 내용은 2010년 방영된 NHK 특집 방송 프로그램 <무연사회: 무연사(無緣死) 3만2천명의 충격>(총 27편) 이야기였다. 3만2천명은 많은 숫자인가, 아닌가. 나는 의외로 적다고 생각했다.
지은이는 타인에게 흥미를 갖지 않는 사회,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사회에서 서로를 염려하며 기꺼이 ‘짐이 되어주는’ 인연사회를 제안한다.(237쪽) 그런데 “인연사회”가 낯설게 느껴진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지연, 학연, 혈연 등 연줄의 악행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연대(네트워킹)와 연줄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회적 약자의 ‘좋은’ 취지의 모임은 연대이고 그렇지 않은 관계는 연줄인가. 아니다. 연대와 연줄의 차이는 새로움에 있다. 기존의 관계를 활용하는가, 의식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가. 이것이 차이다.
하지만 무연사회에서 연대와 연줄의 다름을 논하는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독사의 순간은 그렇다고 치자. 사후를 정리할 인간관계가 없는 죽음. 이것이 이제까지 인류가 달려온 문명사회의 최종 모습인가.
서로 돕고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은 노인, 장애인, 환자를 비롯한 건강 약자들이다. 이들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연’과 ‘무연’은 인간의 조건을 둘러싼 중요한 논쟁거리다.
불성실과 무능력을 연줄로 해결하려는 사람, 나 홀로 간편하게 살려는 사람, 어려운 처지의 타인과 엮이지 않으려는 사람, 타인을 집요하게 괴롭힘으로써 낙오된 자기를 잊으려는 사람. 이들은 모두 다른 타입처럼 보이지만 같은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다. 혼자 살 만한 상태가 영원하리라고 믿는 오만. 노년은 이토록 멀리 있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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