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문학동네·1만6500원
“결혼이란 거짓말투성이야. 대체로는 친절한 거짓말이지만. 말하지 않는 거짓말 말이지. 날마다 배우자에 대한 생각을 입 밖에 내어 말한다면 결혼생활을 짓밟아 뭉개는 거나 마찬가지일 거야.”
미국 작가 로런 그로프의 소설 <운명과 분노>에서 죽음을 앞둔 남자주인공 로토에게 어머니의 혼령이 하는 말이다. 로토와 그 아내 마틸드의 23년에 걸친 결혼생활을 그린 이 소설은 거짓말을 통해서만 지탱되는 결혼생활에 대한 환멸을 표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겉보기와 다른 삶의 이면적 진실을 결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들여다보게 한다. 또, 연극배우를 거쳐 극작가로 입신하는 로토와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마틸드를 통해 예술가와 배우자의 관계를 둘러싼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본문만 600쪽에 가까운 두툼한 소설은 ‘운명’과 ‘분노’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 ‘운명’이 주로 로토의 시점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분노’는 마틸드의 이야기에 해당한다. 두사람이 23년간 결혼생활을 했으므로 겹치는 이야기가 많지만, 같은 이야기라도 처지와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을 드러낸다. 로토의 고교 시절 문학 교사는 학생들에게 비극과 희극의 차이를 묻는 질문을 던지고 “그건 관점의 문제”라는 답을 스스로 내놓는데, 이 답은 죽기 얼마 전 로토가 마틸드에 관한 치명적 비밀을 확인하고 자신의 결혼생활을 돌아볼 때 주제곡처럼 그의 내면에서 울린다.
소설 <운명과 분노>의 작가 로런 그로프. “나는 여전히 결혼에 대해서는 양가적인 마음이지만, 우리 결혼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운이 좋았다”며 남편에게 책을 바쳤다. 문학동네 제공
로토는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데다 머리가 좋고 외모가 출중하며 품성도 선량해 이성과 동성을 불문하고 주변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많다. 일찍이 사춘기 시절부터 “영혼을 섹스에 헌납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많은 여자를 섭렵한 그는 결혼 이후에는 본성을 억누르고 아내에게만 충실한다. 그렇다고 섹스를 줄인 것은 아니어서, “그들의 결혼생활을 줄곧 일관한 것은 섹스였다.” ‘운명’ 부분에서 마틸드의 성장기는 매우 흐릿하고 소략하게 나온다. 그렇다는 것은 로토가 마틸드의 과거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로토는 마틸드에게 자신이 첫번째 남자였다고 굳게 믿었지만, 죽기 얼마 전 접한 비밀로 “그 이야기는 완전히 뒤집혀버렸다.” 로토가 죽은 뒤 마틸드는 “남편이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틸드가 가증스러운 거짓말쟁이이자 악녀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이야기를 담은 부분에 ‘분노’라는 제목이 붙은 데서 짐작되듯 마틸드의 거짓말에는 불가피하고 이해할 만한 구석이 없지 않다. 그가 로토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마틸드가 파악하기에 로토의 장점인 인간적 선의와 순수란 “전쟁은 아주 먼 곳의 이야기인 이 번영의 시대에 남자로, 부자로, 백인으로, 미국인으로 태어난 자의 평화로운 잠”에 지나지 않는다. 미천하고 수상쩍은 계급 출신인 여자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어머니를 상대로 필생의 싸움을 벌이는 마틸드의 슬픔과 ‘분노’는 가해자와 피해자에 관한 관점의 재편을 요구한다.
로토는 배우를 거쳐 극작가로 성공을 거두지만 자신의 성공 뒤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그러니까 “그가 쓴 많은 희곡들, 적어도 절반은 그녀가 밤중에 혼자 몰래 그의 방에 들어가 그가 쓴 것을 더 좋게 고쳐 쓴 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게다가 마틸드는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로토를 위해 일종의 에이전트 역할도 맡았다. 그럼에도 로토는 마틸드가 입회한 공개 강연에서 “아내란 결혼생활을 창작하는 드라마투르그”라며 “만약 여자가 자신의 창의성을 가상의 삶(=예술)이 아니라 실제의 삶을 창작하는 데 쓰기로 한다면 그건 영예로운 선택”이라며, 어디까지나 선의로(!), 주부 예찬론을 펼친다.
세상과 가족을 향한 선의가 무참하게 배신당한 인기남의 몰락이라는 점에서 로토는 필립 로스 소설 <미국의 목가>의 주인공 스위드를 떠오르게도 한다. 마지막 엄청난 반전까지, 감추어졌던 비밀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읽는 재미를 더하는 이 소설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15년에 읽은 최고의 책으로 꼽기도 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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