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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것은 디자이너 랄프 로렌의 이야기일까?

등록 2017-04-20 19:46수정 2017-04-20 20:27

디어 랄프 로렌
손보미 지음/문학동네·1만3500원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2013)의 작가 손보미(사진)는 젊은작가상과 한국일보문학상 등을 받은 문단의 기대주다. 그의 첫 장편 <디어 랄프 로렌>은 패션 디자이너 랄프 로렌의 삶을 추적하는 한국인 유학생을 등장시킨 소설이다.

주인공 종수는 미국 유학 9년 만에 물리학과 대학원 지도교수한테서 내침을 당한 뒤 이삿짐을 정리하던 중 까맣게 잊고 있던 편지 하나를 발견한다. 6년 전에 받고서 책상 서랍에 처박아 두었던 그 편지는 고교 시절 여자친구 수영이 청첩장과 함께 보낸 메모였다. “디어 종수, 나는 아주 잘 지내. 곧 결혼식을 올릴 거야. 나는 무척 행복해. 너도 잘 지내길 바란다.”

고교 시절 속옷과 액세서리에서 겉옷과 신발 등 랄프 로렌의 온갖 제품을 ‘컬렉션’처럼 사 모으던 수영은 코트를 사고자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편, 이 회사에서 만들지 않는 시계를 제조해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영어로 번역해 달라며 종수에게 접근한다. 소설은 종수가 수영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편지를 핑계로 만남을 이어 갔던 십수년 전 서울 강남의 여름 두어달과, 뒤늦게 수영의 청첩 편지를 ‘발견’한 그가 랄프 로렌의 흔적을 좇는 미국의 1년 이야기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짜였다.

랄프 로렌의 삶을 추적한다고는 했지만,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랄프 로렌의 삶을 실제의 그것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엄연히 아직 살아 있는 그가 소설에서는 일찌감치 죽은 것으로 설정되었다거나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별명 ‘리틀 보이’가 ‘리틀 걸’로 바뀐 데서 보듯 소설은 현실과 허구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독자는 실존 인물 랄프 로렌에 관한 사실과 진실을 기대하기보다는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 자체로 즐기는 게 낫겠다. 소설 속 한 인물은 작가 행세를 하며 연락을 취해 온 종수에게 편지를 보내 “왜 당신은 지금 이 시대에 그러한 사람에 대한 책을 쓰려고 합니까?”라고 질책하듯 묻는데, 이것은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작가에게 할 법한 질문이겠다. 그에 대한 답은 여럿이겠지만, 종수 자신이 로렌의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수영 사이의, 전에는 자각하지 못했던 진실을 새삼 확인한다는 것도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수영이 편지 첫 문장으로 삼고자 했지만 종수 자신은 촌스럽다며 비웃었던 말 ‘디어 랄프 로렌’의 진정성을 뒤늦게 확인하고 자신의 과오를 깨닫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최재봉 기자, 사진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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