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목소리-18세기 일본의 담론에서 언어의 지위
사카이 나오키 지음, 이한정 옮김/그린비·3만8000원
번역과 근대를 묶는 것은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특히 주목받는 연구 주제다. 근대 국가가 자신의 ‘내부’를 형성하는 데에는 ‘모국어’라는 개념의 탄생과 이를 가능하게 한 ‘외부’와의 접촉, 곧 번역이 있었다는 식의 서사가 대표적인 접근법이다.
사카이 나오키 미국 코넬대 교수는 이러한 근대화 서사에 맞서 언어와 담론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근대 국가의 문제점을 파헤쳐온 비판적 지식인이다. <번역과 주체>(이산, 2005) <사산되는 일본어·일본인>(문화과학사, 2003) 등 그의 저작들은 그동안 국내에서도 제법 출간됐는데, 이번에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과거의 목소리>가 출간되어 나왔다. 1983년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을 가다듬은 책으로, 그의 지적 여정의 출발점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이 책은 일본 정치사상사의 권위자인 마루야마 마사오(1914~96)가 대표하는 일본의 근대화 담론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그동안 일본 사상사에서는 오규 소라이(1666~1728), 모토오리 노리나가(1730~1801) 등 18세기 지식인들이 동아시아의 보편적 담론인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읽으며 이른바 ‘국학’을 벼려낸 과정에 주목해왔다. 그때부터 시작된 번역에 대한 고민이 일본어를 모국어로 인식하게 하고, 결국 일본인이라는 근대적 주체로 나아갈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마루야마는 “다른 문화의 이질성을 자각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인식하려는 욕구가 강해질 때 비교적 독창적인 사상이 나온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토 진사이(1627~1705)는 오규 소라이(1666~1728)와 함께 일본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일본 근대 사상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림 위키피디아
이에 대해 지은이는 “에도시대 국학자들의 작업은 이제까지의 일본 사상사에서 언제나 ‘일본인의 자각의 역사’라는 것으로 횡령되었다”고 비판한다. 번역과 근대의 문제를, 단지 모국어를 인식하고 이를 통해 국민으로 나아갔다는 식의 ‘국민적 주체 형성의 역사’로만 풀이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는 ‘타자’를 부인하고 균질적인 하나의 구성체(일본인·일본어)에 강박을 갖는 폐쇄적인 일본 내셔널리즘의 구조가 그런 담론 기획 위에서 만들어졌다는 비판으로도 연결된다.
지은이는 주류 사상가들이 주목한 오규 소라이 대신, 이들보다 한발짝 앞서 ‘송리학’(宋理學·주자학)을 비판적으로 읽고 유교 경전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한 이토 진사이(1627~1705)에게 주목했다. 오규 등과 달리 이토는 번역이란 문제 자체에 대해 별도의 인식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토가 송리학을 비판하는 가운데 텍스트와 현실 사이의 관계를 재편하려고 했던 노력을 ‘발화행위’, 곧 “이질적인 것을 폭로할 수 있게 해서 담론의 한계를 제시하는” 행위였다고 평가하고 주목한다. 송리학에 대한 이토의 비판은 송리학이 텍스트를 통해 강제해왔던 담론 체계에 균열을 일으켰고, 이를 통해 새로운 담론의 필요성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성’(誠) 개념에 대한 풀이다. 송리학은 ‘성’을 “오염된 자기로부터 본래적인 성(性)으로 이행하는 것”, 곧 주관적인 내면성으로의 회귀라고 봤다. 그러나 이토는 애초 ‘나’는 그 자신의 고정적인 소유자가 아니고 물질적·사회적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우발적으로 자신을 형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담론 자체가 위선적이라고 비판했다. 지은이는 이토의 논의의 중심에 “타자에 대한 개방성”이 있다고 봤다. 언어로 상정된 규범이 실천보다 선행한다고 믿었던 송나라 유학자들과 달리, 이토는 윤리적 규범이란 타자와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실행에 의해 이뤄진다고 봤다는 것이다. “이토에게는 역사를 넘어선 곳에서 어떤 이상 사회의 모델, 어떤 기원도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윤리학은 비기원적이다.”
반면 일본의 근대화 서사가 주목한, 오규 소라이로 대표되는 18세기 담론은 여러모로 이토와 대조적이다. 중국 문헌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마주한 오규는 “친밀하고 즉각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통일적이고 투명한 언어 환경, 곧 ‘일본어’라는 이상적인 ‘내부’를 설정하려 했다. 이런 식으로 중국어에 대응되는 일본어의 기원과 체계를 상상하고, 민족과 언어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담론이 조직화됐다. 때문에 지은이는 “18세기 담론에서 일본어·일본인이 탄생했을 때 그것은 이미 먼 옛날에 죽은 것, 곧 사산(死産)된 것이었다”고 말한다. 고난도의 담론 분석을 통해 내부의 동일성을 우선시하며 타자를 배제해온 일본의 폐쇄적인 자민족중심주의의 실체를 까발린 책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