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라신을 읽으며 실연의 상처를 달래다

등록 2017-04-20 19:46수정 2017-04-20 20:25

프랑스 작가 소설 ‘티투스는 베레니스를…’
라신 삶과 희곡 ‘베레니스’ 등에 의지해
유부남한테 실연당한 아픔 벗어나
티투스는 베레니스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탈리 아줄레 지음, 백선희 옮김/무소의뿔·1만5000원

“나는 그를 사랑해서 그를 피합니다. 티투스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떠납니다.”

프랑스 극작가 장 라신(1639~1699)의 희곡 <베레니스>에서 유대 왕의 여동생인 주인공 베레니스가 연인인 로마 황제 티투스를 떠나보내며 읊는 대사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반란을 진압했던 티투스는 유대 왕 아그리파 2세의 누이동생 베레니스를 사랑했으나, 베레니스에게서 안토니우스를 파멸시킨 클레오파트라를 떠올리며 의심하고 경계했던 로마 시민들을 의식해 사랑을 포기했다.

“티투스는 베레니스를 사랑하고, 그래서 그녀를 떠난다.”

라신의 삶과 작품을 통해 실연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여자를 그린 소설 <티투스는 베레니스를 사랑하지 않았다>의 작가 나탈리 아줄레. “절제미와 품격이 돋보이는 문체”라는 평을 들으며 2015년 메디치 상을 수상했다. 무소의뿔 제공
라신의 삶과 작품을 통해 실연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여자를 그린 소설 <티투스는 베레니스를 사랑하지 않았다>의 작가 나탈리 아줄레. “절제미와 품격이 돋보이는 문체”라는 평을 들으며 2015년 메디치 상을 수상했다. 무소의뿔 제공
프랑스 작가 나탈리 아줄레의 소설 <티투스는 베레니스를 사랑하지 않았다>의 도입부는 티투스와 베레니스로 지칭되는 남녀의 이별 장면이다. 유부남인 티투스는 연인이었던 베레니스와의 사랑을 접고 아내인 로마와 자식들이 기다리는 가정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티투스는…>은 버림받은 베레니스가 독특한 방법으로 실연의 아픔과 싸우는 과정을 그린다. 그 방법이란 라신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자신을 티투스에게 버림받은 베레니스에 견주는 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라신의 전 작품을 다시 읽으며 라신의 삶 자체를 자기 식으로 재구성해 보는 작업. “만일 그녀가 어떻게 그 시골 평민 출신이 여자들의 사랑에 관해 그토록 감동적인 시를 쓸 수 있었는지 이해하게 된다면 티투스가 왜 그녀를 떠났는지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2015년 메디시스(메디치) 상을 받은 이 소설은 실연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투쟁과 치유의 기록이자 라신의 시적 전기이기도 하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고아로 자란 라신은 포르루아얄의 수도원에서 그리스·로마 고전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문학의 꿈을 키운다. 스무살 무렵 파리로 올라온 그는 여인들과 어울리는 살롱과 문학의 세계에 급속히 빠져드는데, 포르루아얄로 대표되는 경건한 학문과 신앙의 세계와 파리로 상징되는 쾌락과 문학의 세계는 이후 그의 삶과 정신을 양분하게 된다. 그러니까 “한편에는 포르루아얄이 있고, 다른 편에는 파리가 있다.”

라신은 한 세대 위인 코르네유와 17년 연상인 몰리에르를 상대로 일종의 인정투쟁을 벌이면서 극작가로 성공을 거두는 한편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한다. 그의 대표작 <앙드로마크>와 <베레니스>는 각각 뒤파르크와 마리라는 당대 최고 여배우들이 주연을 맡았고 라신은 그들과 연인 관계를 맺었다. 그럼에도, 그런 열정적 사랑의 한가운데에서도, 라신은 이렇게 냉소적으로 말한다.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감미롭지도 다정하지도 않으며, 증오보다 사랑에 더 가까운 건 없다.”

극작가로 성공을 거둔 라신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눈에 띄어 세속적인 성공 역시 거둔다. 왕의 후원을 받고 권력까지 거머쥔 그는 문학보다는 왕을 보필하고 그의 업적을 건조한 연대기로 남기는 일에 더 주력한다. 그즈음 마리와 헤어지고 사랑 없는 결혼까지 한 그는 희곡과 연극의 세계에서 완전히 떠난 듯했다. “진창을 뒤집어쓴 진짜 군대에 비하면 연극이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나 라신의 말년은 파리가 보장하는 쾌락과 문학, 그리고 권력의 세계와 거리를 두고 포르루아얄의 신앙과 금욕적 세계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며, 죽은 뒤 그는 유언에 따라 포르루아얄에 묻힌다.

소설에서 라신의 죽음은 티투스의 죽음과 거의 동시적으로 서술된다. 그에 앞서 티투스의 가족들은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베레니스를 보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해 온다. 헤어진 지 1년여 뒤의 일. 고민 끝에 티투스의 집 앞까지 갔던 베레니스는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되돌아 나오며 차갑게 곱씹는다. “그들은 아직 그를 잃는다는 게 뭔지 알지 못한다. 반면에 그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니, 두번째 상실은 첫번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베레니스 자신 “자기 안에 그런 잔혹함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노라고 토로할 정도로 냉혹한 마음으로 그는 티투스의 장례식까지 지켜본 다음 집으로 돌아와 라신의 책들을 정리한다. “티투스가 결코 베레니스를 사랑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녀를 사랑한 일”의 종말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