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나희덕 지음/달·1만4000원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지평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 까마득히 멀어지는 풍경,/ 그 쓸쓸한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나는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 하네”(나희덕 시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부분)
나희덕(사진) 시인의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는 여행지에서 만난 풍경과 그로부터 건져올린 상념을 담은 여행 산문집이다. 시인은 이름난 관광지의 빼어난 경관에 감탄하기보다는 여행자의 마음에 들어와 박힌 순간의 이미지와 느낌, 사유를 자기만의 언어로 풀어놓는 데에 치중한다. 에든버러에서 마주친 거리 음악가들과 그 음악에 맞추어 약동하는 삶의 에너지를 분출하는 아이를 묘사한 아래 대목이 대표적이다.
“아이의 들린 발을 보라!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없이, 비상(飛上)의 본능에 가장 충실한 이 영혼을 보라! (…) 한 아이에 의해 점화되어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났고, 결국 광장은 춤추는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찼다. 춤에 서투른 내 몸도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팽팽하게 부푼 백파이프의 가죽주머니와 연주자의 두 뺨처럼, 내 심장도 함께 부풀어올랐다.”
책에는 시인이 직접 찍은, 춤추는 아이의 사진도 실려 있어 현장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이 사진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꼭지에 글 내용과 관련된 사진이 첨부되었다. “한 손으로는 개를 쓰다듬어주고, 다른 한 손으로는 책을 잡고 있는” 런던의 젊은 노숙인, 베이징의 오래된 골목에서 마주친 원숭이 형상 벽,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만이 녹슬지 않는다”는 경구를 떠올리게 한 류블랴나 시내 다리의 ‘사랑의 자물쇠’ 등도 곁들인 사진 덕분에 한결 실감나게 다가온다.
“뒷모습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세상에 넘치는 거짓과 위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나마 정직하고 겸손할 수 있는 것은 연약한 등을 가졌기 때문이다. 뒷모습을 가졌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시인이 낯선 이들의 다양한 뒷모습에 특히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이 이채롭다. 일상의 번다와 부담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유로운 상태가 되어서야 타인의 뒷모습이 감춘 연약한 진실에 눈이 가게 되는 것일까. 시와 문학이란 춤추는 아이의 발을 닮아서 거침없는 자유와 비상을 꿈꾸지만, 그 꿈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불구적 조건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깨달음 또한 여행이 주는 선물이라 하겠다.
“시는 근원적으로 무애(無碍)한 비상을 꿈꾸지만, 그것이 빚어지는 공간은 오히려 비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최재봉 기자,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