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원저자 이림찬의 ‘중국미술 통사’ 명강의 인기 많았죠”

등록 2017-06-13 22:45

【짬】 출판인에서 저자로 변신한 장인용 대표

<중국미술사>를 번역해낸 장인용 지호출판사 대표.
<중국미술사>를 번역해낸 장인용 지호출판사 대표.

<연필>, <의자>, <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 <신들의 열매 초콜릿>, <설탕과 권력>, <소금과 문명>, <담배의 역사>, <감자 이야기>….평범한 소재로 인류 문명이란 큰 얘기를 풀어내는 책을 만들어, 책쟁이들을 유혹했던 지호출판사. 2~3년 전부터 신간 소식이 들리지 않더니, 출판사 대표와 이름이 같은 지은이의 책이 나오기 시작했다. <원세개>, <그림으로 읽는 중국신화> 등 번역서를 시작으로 음식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를 돕는 <식전, 팬더곰의 밥상견문록>, 중국의 고대 제도와 조선의 건국을 조명한 <주나라와 조선>이 나왔다. 지호출판사 장인용(60·사진) 대표 바로 그였다. 남의 책을 펴내는 출판인에서 자신의 책을 쓰는 저자로 변신한 것이다. 올해 초에는 600쪽이 넘은 번역서 <중국미술사>(다빈치)를 펴냈다. 지난 8일 서울 홍익대 부근 카페에서 만나 저간의 사정을 들었다.

이림찬 강의록 ‘중국미술사’ 600쪽 번역
1980년대 타이완대 유학때 배운 ‘인연’
“일반인 청강생도 몰려 미리 가야 자리”

책쟁이 알아주던 지호출판사 20년 운영
‘황반변성’ 실명 경고에 출판업 접어
“그림에 담긴 사람 이야기 책 쓰는 중”

“재작년부터 사실상 출판사를 접었어요. 눈이 부셔서 컴퓨터 모니터를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흔다섯에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고 눈이 부셔서 고통스러웠다. 황반변성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레이저로 환부를 지져 응급조처를 하니 회복됐다. 5년 뒤 재발해 병원에 가니 더는 시술을 못 하겠다고 했다. 바로 터진 핏줄을 막으면 망막이 괴사한다고 했다. 석 달을 기다려 치료를 받았는데 원상회복이 되지 않았다. 쉰다섯에 황반변성이 또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병세가 심각해 출판일을 계속하는 것은 스스로 눈을 찌르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책을 쓰게 된 것은 제 눈이 나빠진 탓이 큽니다. 에이전시를 하는 대학 후배와 잘 아는 다빈치출판사 박성식 대표가 대만 책을 가져와 번역하면 괜찮을지, 역자로 누가 적당할지를 물었죠. 그게 이 책인데요, 번역이 저한테 떨어질 줄은 몰랐어요.” 애초 그들이 ‘장인용’을 역자로 찍어두고 접근한 게 뻔한데, 순진한 건지 눙치는 건지 알 수 없다.

<중국미술사>는 대만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부원장 이림찬(1913~99)이 다년간 강의한 중국미술 통사를 1년 과정에 맞춰 정리해 1987년에 펴낸 책이다. 당시 강의는 대만대학 문학원 뒤 대형강의실에서 매주 토요일 열렸는데, 명강으로 소문이 나 학부생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청강하는 통에 한시간 전부터 자리를 잡아야 했다. 1941년 박물관에 들어온 이래 40년 이상 중국회화를 파고든 덕분에 풍부한 도판을 바탕으로 한 이림찬의 열정적인 강의에는 수백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그림 속의 숨은 면모가 그득하게 들어 있었다. 명과 청, 두 왕조에서 수집한 명품을 고스란히 수장한 고궁박물원의 부원장으로서, 실물을 직접 대하고 세심한 관찰과 작품 비교를 통해 나온 정보들이니 오죽하겠는가. 마침 성균관대에서 중문학을 전공한 장씨는 대만대학 유학 시절 중국미술사를 공부할 때 그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훗날 이 책이 나오자 재밌게 읽은 터였다.

“이전에도 중국미술사 책이 물론 다수 있었죠. 중국미술을 전공한 서양인, 또는 서양미술 세례를 받은 중국인들이 썼어요. 제임스 케이힐의 <중국회화사>가 대표적입니다. 중국회화를 양식 변화를 중심으로 일목요연하게 설명합니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이 책을 보고 중국미술의 진면모를 제대로 기술했구나 생각했어요.”

전통적인 동양화는 ‘시·서·화 일체’라는 인식체계에서 나온 터라, 시와 글씨를 모르고는 설명할 수 없다. 케이힐의 책은 화론을 중심으로 있지도 않은 그림을 설명하거나, 그림의 배경이 되는 시를 언급하지 않아 납작보리 같은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고개지, 미불·미우인 부자, 마원, 황공망, 예원, 조맹부 등 쟁쟁지사의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원화 도판과 함께 풀어내 직접 강의를 듣는 기분이 든다. 말로만 들었던 고개지의 <여사잠도>, 황공망의 두루마리 그림 <부춘산거도> 등 명품들이 곳곳에 들어 있다. 게다가 그림에 쓰인 화제나 평문에 대한 해설을 곁들임으로써 독자를 그림이 그려진 시대로 끌어올린다. 우리한테는 낯설지만 중국회화에서 독립항목으로 분류되는 사녀화. 궁정의 여인들을 그린 이 그림에는 모계사회의 흔적이 담겨 있다는 설명이 이채롭다. 소한신의 <추정영희도>에서 생대추 세 개와 이쑤시개 나무로 만든 옛 장난감 놀이를 복원하기도 한다. 영국의 도자기광 데이비드 경이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중국의 국보 순회 전람회를 찾아와 북송의 여요를 만져보고 싶다는 걸 이미 진열장에 들어 있어 힘들다며 거절했다는 일화 등 읽을거리도 풍부하다.

“책의 마지막 29장을 번역할 때 컴퓨터가 망가져 데이터가 몽땅 날아갔어요. 석달 동안 손놓고 놀아야 했습니다.”

강연에 바탕한 터라 내용 중복이 많은데 이를 덜어내고 한국 독자를 배려해 원저에 없는 역주를 많이 달았다. 그림의 크기 표기를 가로세로로 바꾸고, 고열에 구운 자기가 식으면서 생긴 ‘표면 갈라짐’을 관입·관유·빙렬 따위의 용어를 버리고 ‘식은티’라는 용어를 발굴해서 썼다. 모두 오랜 출판 경험에서 우러난 지혜다. 대학원생까지는 읽을 만할 거라고 했다.

“문징명이 예순살에 과거에 급제하며 화풍이 달라졌어요. 평생 과거시험에 매달렸는데, 소원을 이루면서 달라진 기분이 그림에도 반영돼 씩씩해진 거죠.” 그는 옛 그림을 굳이 엄숙하게 풀어낼 필요가 없고, 실제로 그림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배어 있다며 그런 책을 여러 권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눈이 나빠지는 바람에 책을 쓰게 된 그를 지켜보며 새로운 작가의 탄생을 기뻐해야 하는지 헷갈린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