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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회한을 엎지르고 깨달음을 뒤적이다

등록 2017-06-15 19:43수정 2017-06-15 20:09

슬픔은 어깨로 운다
이재무 지음/천년의시작·9000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이 싫어 고향을 떠났다/ 숙식을 찾아 도시의 거리와/ 골목을 헤매었다/ 낯선 이들을 만나/ 인연을 맺고 풀었다/ 여자와 살림을 차려/ 아들을 얻었다/ 웃는 날도 있었지만/ 우는 날이 더 많았다/ 영혼의 나무에/ 상처와 함께 옹이가 박혔다”(‘농부의 아들’ 전문) 이 시를 이재무(사진) 시인 자신의 60년 생애의 시적 요약이라 해도 좋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또한 ‘58 개띠’라는 유명짜한 또래 집단의 삶을 대표하는 초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열한번째 시집 <슬픔은 어깨로 운다>는 농부의 아들에서 도시의 시인으로 거듭난 그의 회한과 깨달음을 담았다.

“뒤적인다는 것은/ 내 안에 너를 깊이 새겼다는 것/ 어제를 뒤적이는 일이 많은 자는/ 오늘 울고 있는 사람이다”(‘뒤적이다’ 부분)

“살구꽃 흐드러진 봄날/ 네게 엎지른 감정,/ 울음이 붉게 타는 늦가을/ 나를 엎지른 부끄럼/ 시간을 엎지르며 나는 살아왔네”(‘엎지르다’ 부분)

‘뒤적이다’와 ‘엎지르다’ 같은 동사가 그에게는 회한의 감정을 실어 나르는 매개가 된다. 관계와 시간은 회한의 뿌리이자 숙주라 하겠다. 그런 회한에 시달릴 때면 그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허공에는 실은 무와 허와 공, 다른 말로 무한이라는 존재의 본원이 가득 들어차서 그를 다독이고 이끌어 준다.

이재무 시인
이재무 시인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허공에는 고요가 우거져 있고 무가 들어차 있고 무한이 펼쳐져 있고 허와 공이 있다. 허공은 무너지지 않는다. 모든 존재의 어머니이자 고향인 허공. 고뇌에 찬 그대가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허공’ 부분)

수명이 늘어나서 그 느낌이 예전과는 다르긴 해도, 회갑을 코앞에 둔 시인이 죽음을 의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불안해하거나 안달하지는 않는다. “숟가락 엎어놓으면// 그 형상 무덤 같다// 생사의 거리가// 이만큼 가깝고 멀다”(‘생사의 거리’)는 깨달음 위에 “삶은 짧고 추억은 깊으니/ 오직 현재에만 몰두하리라/ 마음껏 아름답게 시간을 낭비하리라”(‘후생’)라는 낙천적인 다짐을 새길 따름이다.

‘나는 표절 시인이었네’는 문학적 범죄 행위가 아니라 자기 시의 뿌리와 지향에 대한 애정 어린 고백으로 읽힌다.

“나는 표절 시인이었네 고향을 표절하고 엄니의 슬픔과 아부지의 한숨과 동생의 좌절을 표절했네 바다와 강과 저수지와 갯벌을 표절하고 구름과 눈과 비와 나무와 새와 바람과 별과 달을 표절했네”(‘나는 표절 시인이었네’ 부분)

글 최재봉 기자,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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