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시 후미코 지음, 안은미 옮김/정은문고·1만1800원 “나는 숙명적인 방랑자다. 내게는 고향이 없다.”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여성작가 하야시 후미코(1903~51)는 소설 <방랑기>를 이렇게 시작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잡일꾼, 사무원, 여공, 카페 여급으로 일했던 작가는 방랑의 삶 속에서 글쓰기를 이어갔고 사람에게 지치면 여행을 꿈꾸었다. <삼등여행기>는 그가 <방랑기>의 인세를 받아 들고 떠난 유럽행 여행기다. 부산, 서울, 하얼빈, 이르쿠츠크, 모스크바, 바르샤바, 베를린, 파리까지. 갈 땐 기차로, 올 땐 지중해와 인도양을 가로질러 배를 타고 왔다. 전쟁의 총소리가 나던 1931년 11월. 작가는 “어느 곳에 있더라도 죽는 건 매한가지”라며 용감하게 트렁크를 들어 옮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삼등칸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맹추위를 견디며 소금국 같은 수프를 마시고 앞으로 무사할지 막연한 미래에 가끔 불안에 떤다. 일본의 나룻배처럼 떼지어 줄줄이 걸터앉은 삼등 열차 속 사람들은 굶주리면서도 커다랗게 노래를 불렀다. 지친 몸을 이끌고 파리에 도착했을 땐 일주일 동안 “돌인 양” 잠만 잤다. “언제나 진실한 것은 파묻혀 지나가고 다소 연극적인 것이, 으스대는 것이, 상스럽게 비하하는 자들이 어이없게도 어느 나라든 특권을 갖는구나.” 자면서도 했다는 생각이다. 돈을 아껴 빵을 씹으며 끝없이 걷고 매일같이 몽파르나스의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는 그. 30년대 아시아와 유럽의 서민문화와 풍경, 어이없을 만큼 무모하고도 씩씩했던 한 여성작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