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깡의 인간학-<세미나7> 강해
백상현 지음/위고·2만5000원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란 구호를 내건 자크 라캉(1901~81)은 1953년부터 27차례에 걸쳐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을 가다듬은 내용으로 공개강연을 꾸준히 열었다. 강연록인 <세미나> 시리즈는 유일한 저작인 <에크리>(1966)와 함께 라캉의 사유를 들여다볼 수 있는 주된 경로다. 국내에는 <세미나1> <세미나11>만 완역 출간된 상태다.
라캉을 깊이 연구해온 정신분석학자 백상현이 <세미나7>에 대한 강해서를 펴냈다. 지은이 스스로 밝히듯 아직 국내에 번역조차 되지 않은 텍스트를 분석하고 강해한다는 것에 의문이 들 수 있다. 왜 이미 번역된 텍스트의 강해부터 시작하지 않는가? 지은이는 “<세미나7>이 라캉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라며, “미번역된 텍스트이지만 이것을 소개하고 강해하는 것이 국내 학계를 떠도는 라캉에 대한 오독과 몰이해를 일소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는다”고 밝혔다. 지은이는 “지식이 아닌, 인간을 보는 관점”으로서 라캉 사유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어한다.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가 고향 테바이에서 추방당해 콜로노스에 들어서는 장면. 샤를 프랑수아 잘라베르 그림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연도 미상). <한겨레> 자료사진
<세미나7>은 1959~60년 사이 24차례 연 세미나를 묶었는데, ‘정신분석의 윤리’라는 제목이 달렸다. 거칠게 말해, 정신분석에서 ‘주체’는 언어처럼 구조화된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환각이다. 인간은 쾌락을 소망하는 근원적인 충동(‘주이상스’)과 이에 대한 억압이라는 역설적인 관계 속에서만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라캉은 인간 심리의 중핵에 이런 역설을 불러일으키는 대상 또는 자리가 있다고 봤는데, 프로이트의 표현에 따라 그것을 ‘큰사물’(Das Ding)이라 부른다. 큰사물은 근원적 충동이 추구하는 쾌락의 대상이지만, 결코 기표로서 모습을 드러낼 수 없고 철저히 은폐된다는 점에서 모순적인 속성을 지닌다. 곧 “큰사물의 존재론적 위상은 공백”이다.
인간 심리는 이 큰사물을 중심으로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이 서로 교차하며 마치 건축물처럼 형성되는데, 여기서 라캉이 집중하는 대목은 그것이 윤리적인 구조를 지녔다는 점이다. 쾌락과 억압이라는 양극점이 현실을 만들어내는데, 여기서 억압은 ‘도덕의 명령’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쾌락원칙’이 끊임없이 쾌락의 좌표를 찍는 방향으로 주체를 움직인다면, ‘현실원칙’은 도덕에 기대어 큰사물을 악으로 가정하고 끊임없이 거짓말로 이를 감추려 한다. 인간 문명의 역사는 주체를 안정화하기 위해 이 두 가지 원칙을 서로 교차시키며 쾌락과 타협해온 역사라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분석에 의해 커다란 구멍이 뚫리기 이전 문명이 자신을 지탱해온 축으로 삼아온 도덕과 윤리의 실체라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라캉의 구호는, 이처럼 주체를 안정화시키고 성숙시키는 데 골몰해온 ‘목자’의 도덕과 윤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로이트의 발견을 다시 되새기자는 취지라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주어진 도덕관념을 따르는 것은 결코 도덕적이지 않다는 사유는 프로이트가 아니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윤리학과 심리학의 터닝포인트”라는 것이다. 때문에 주체가 자신이 사로잡힌 도덕규범과 초자아의 환상들을 넘어서는 것이 정신분석 이후 윤리의 과제가 된다.
그렇다면 라캉이 말하는 정신분석학의 윤리는 무엇을 향하는가? 그것은 도덕이 아닌 ‘위반’을 목표로 삼는, ‘위반의 도덕학’이다. 프로이트는 ‘승화’라는 개념을 통해 결코 만족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 다른 대상으로 적절히 대체되는 상태를 말한 바 있다. 라캉은 이 ‘승화’ 개념을 아예 “욕망의 대상을 큰사물의 수준으로 승격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큰사물 자체를 욕망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충동이지만,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다시 시작될 수 없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 대한 분석은 이런 위반의 도덕학을 잘 드러내준다.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금지하는 크레온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지상의 법’을 대표하지만, 그의 강박신경증적인 집착 속에서 가문과 국가는 몰락해간다. 반면 안티고네는 ‘지상의 법’ 속에 맴돌지 않고 오빠를 매장하겠다는 자신의 욕망으로 직진한다. 크레온보다 안티고네가 매혹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욕망을 규정하는 중핵(큰사물)을 실제로 보여주기 때문”이며, “그것은 이제까지 발화될 수 없었던 미스터리함을 내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죽음을 욕망하지 않는다면, 삶을 고정시키는 환영적 욕망의 기둥들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새로운 삶은 시작될 수 없음을 주장하는 윤리”, 곧 ‘창조론적·발생론적 윤리”라고 말한다.
결론 부분에서 지은이는 <세미나7>을 포함한 20여년 동안 라캉의 지적 여정 전체가, ‘공백으로의 회귀’라는 움직임을 반복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라캉의 이론 속에서 우리가 진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특정 이론의 ‘의미’가 아니라 그런 운동 자체”라는 것이다. “라캉의 의미는 공백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무한 반복의 시시포스적 윤리를 실천하자는 의미를 가질 뿐”이라고도 말한다. 정신분석은 결코 환상의 봉합을 통해 증상을 소멸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으며, 법과 초자아가 무의식에 남긴 장벽을 위반하고 넘어서려는 반복적 시도들을 통해 주체가 끝내 자신의 증상을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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