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근대가 고대를 극복했다”는 편견을 깨다

등록 2017-06-29 20:05수정 2017-06-29 20:44

이상인 연세대 교수 인터뷰
근대가 왜곡한 고대 진면목 소개
고대와 근대의 논쟁들-문제로 읽는 서양철학사
아르보가스트 슈미트 지음, 이상인 옮기고 엮음/길·3만3000원

서양철학사는 그동안 근대에 탄생한 새로운 사유가 옛 사유를 철폐했다고 주장하면서 고대와 중세를 사실상 ‘전-근대’로 대접해왔다. 이렇게 근대가 만들어낸 고대는 직관이 지배하는 소박한 시기로만 기억된다. 그런데 근대가 내세우는 성취가 이미 고대 속에 들어 있던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근대는 진정으로 고대를 넘어섰는가?

아르보가스트 슈미트 독일 마르부르크대 교수는 고전문헌학이라는 탄탄한 기초 위에서 근대가 왜곡해온 고대의 진면목을 새롭게 발굴해온 학자다. 그는 ‘근대의 자기 이해와 고대 해석’이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1992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있는데, 프로젝트의 주된 교훈은 “근대의 잘못된 자기 이해가 고대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최근 이상인(사진) 연세대 철학과 교수가 편역한 <고대와 근대의 논쟁들>은 이런 슈미트의 학문적 성과를 쟁점별로 잘 다듬어 담은 책이다. 슈미트는 이 교수의 독일 유학 시절 지도교수이기도 하다.

지난 27일 저녁 경기도 성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 교수는 “근대는 역사적 연속성을 외면하고 고대와의 단절만을 강조했는데, 그것이 인간의 사유 능력과 그 가능성을 축소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그동안 서양 철학의 역사적 변화 방향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숭고한 것에서 세속적인 것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에서 쉬운 것으로, 소수에게만 허용된 것에서 다수에게 허용된 것으로, 영혼에서 물체로, 이성의 능력으로부터 경험의 능력으로” 흘렀으며, 그 주된 이유는 근대가 고대의 성취들을 배제해버린 데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보편 논쟁’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양철학사에서는 보편 개념이 발전해온 역사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플라톤은 이 세계 밖에 있는 ‘이데아’가 초월적인 실재성을 지닌다고 주장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이 세계로 끌어내려 보편자는 개별자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 뒤 신플라톤주의가 플라톤의 ‘보편자 실재론’을 지지했던 반면, 중세에는 다시 토마스 아퀴나스 등을 중심으로 보편자가 사물 안에 존재한다는 신념이 확산됐다. 그러다 중세 말기에 등장한 ‘유명론’이 ‘술어로서의 보편자’ 개념, 곧 “사유는 잡다한 감각 자료들을 주관적 관점들 아래 통일하고, 그렇게 정립된 통일성을 다수의 것들에 동등하게 적용되는 술어로 표현한다”는 통찰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슈미트와 그의 학파는 이런 설명이 거짓이라고 본다. 이 교수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철학자들은 이미 보편자의 종류를 ‘사물 이후의 보편자’, ‘사물 안의 보편자’, ‘사물 이전의 보편자’ 등 세 가지로 나눠서 파악하고 있었는데, 유명론자들이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중 하나인 ‘사물 이후의 보편자’ 개념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고대 철학의 내용 가운데 유명론자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내용만 떼어내어 자신들의 주장에 따라 재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란 얘기다. 그런 일방적인 재단을 거치며, 인간의 서로 다른 인식 능력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인식되는 보편자가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은 단지 편협한 ‘사물 안의 보편자’ 이론으로 과소평가받은 셈이다.

이 교수는 “고대의 통찰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사유에는 여러 층위가 있는데, 근대 학문은 더 고차원적인 사유의 가능성을 외면하고 단지 사유를 ‘의식’의 수준으로만 고정시켰다”고 비판했다. 철학이 ‘만학의 여왕’이었던 고대와 다르게 근대에는 개별 학문들이 저마다의 자리를 주장했는데, 특히 큰 영향력을 갖게 된 자연과학은 경험을 지식의 확실성을 담보해주는 원천으로 삼았다. 그 결과 “인간의 사유는 수동적인 감각 기관을 통해 무질서하게 주어지는 자료들을 어떻게 ‘의식’으로 전환할 것인가에만 머물게 됐다”고 이 교수는 지적했다. “사유는 과소평가된 반면 감각은 과대평가됐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처럼 세 종류의 보편자를 구분할 수 있다면, 개별적 보편자(사물 안의 보편자)로부터 ‘질료’를 떼어내어 초월적 보편자(사물 이전의 보편자)를 사유하는 것은 인간 이성의 가장 고차원적인 작업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근대는 왜 고대를 이렇게 왜곡했을까? 이 교수는 “근대는 정치권력의 민주화, 지식권력의 세속화 등 기존의 예속으로부터 ‘자유’를 구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시기”라는 데 주목했다.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새로운 기반으로 삼으려다 보니, 자유를 보편적으로 주어져 있는 개념으로만 인식했을 뿐 그것을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키고 발전시켜야 할 것으로는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그 과정에서 고대가 갖고 있던 인간의 영혼이나 사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잊혀졌다”고 말했다.

보편 논쟁 이외에도 책은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인식론 비교, 근대적 과학 개념에 대한 고대적 비판, 경제학·미학·정치철학 등에서의 근대와 고대 비교 등을 담고 있다. 이 교수는 “서양철학사는 근대가 고대를 극복하고 발전의 역사를 밟아온 것처럼 서술하지만, 슈미트의 작업은 그것 자체가 편견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근대로 지양될 수 없는 고대의 고유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기존 서양철학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훨씬 더 풍요롭게 하고, 미래 철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좌표를 설정하는 데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글·사진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