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후퇴-불신과 공포, 분노와 적개심에 사로잡힌 시대의 길찾기
지그문트 바우만 등 지음, 박지영·박효은·신승미·장윤경 옮김/살림·1만8000원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1989년, 미국 역사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만이 끝내 현대 사회의 유일한 승자로 남았다며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다. 그러나 “역사의 종언” 뒤에 찾아온 것은 “역사의 후퇴”였다. 국가와 사회의 손에서 벗어난 자본은 국가와 사회의 보호에서 내팽개쳐진 사람들의 삶을 뿌리까지 갉아먹으며 덩치를 급격하게 불렸다.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비웃듯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앞세우는 권위주의 정부들이 속속 들어섰다. 이주민, 외국인,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극에 달했다. 테러는 빈발하고 국제 질서는 요동친다. 과연 이것을 ‘후퇴’가 아니면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거대한 후퇴>는 독일의 권위 있는 출판사 주어캄프가 기획한 프로젝트의 하나로, 15개국에서 동시 출간되었다.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민주주의 퇴보, 신자유주의 득세 현상들을 ‘거대한 후퇴’의 징후로 여기고, 그 근본적인 문제를 진단하면서 대응을 논의하기 위해 저명한 지식인 15명으로부터 글을 받았다. 지그문트 바우만을 비롯해 아르준 아파두라이, 낸시 프레이저, 브뤼노 라투르, 볼프강 슈트렉, 슬라보이 지제크 등이 여기에 참여했다. 단행본 출간은 기획의 1단계일 뿐이다. 책 출간과 함께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인터뷰, 강연, 세미나 같은 행사들이 열리는 등 추가 기획도 뒤따른다. 독자들도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논의에 참여할 수 있다.(프로젝트 누리집
www.thegreatregression.eu 참고)
다양한 배경을 지닌 필자들의 목소리는 대체로 비슷한 곳으로 수렴한다. 먼저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분석들을 살펴보자. 세계적으로 사람들은 민주주의에서 ‘이탈’하고 있고, 포퓰리즘을 앞세운 권위주의 정치세력들이 그 빈자리를 빠르게 메워가고 있다. 러시아의 푸틴, 필리핀의 두테르테, 터키의 에르도안, 인도의 모디 등이 권위주의 포퓰리즘으로 정권을 장악한 대표적인 사례들이고, 유럽에서도 극우 정당들이 갈수록 세를 불려가고 있다.
인도 출신 인류학자 아르준 아파두라이는 이에 대해 주목할 만한 분석을 내놓는다. “현대의 어떤 국민국가도 자국의 국가 경제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89년 이후 자유주의 팽창에 따라 급격히 진행된 시장의 세계화로 이젠 국가가 보호하고 발전시키겠다고 주장할 수 있는 ‘국가 경제’가 없는 상황이 됐다. 따라서 포퓰리즘 세력들은 경제 주권의 쟁점을 문화 주권의 쟁점으로 옮겨 자신들의 영토를 개척하고 있고, 민주주의 약화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주민 혐오, 민족국가주의, 문화적 다수결주의, 인종차별주의, 반대 의견에 대한 억압 등의 현상이 이를 말해준다.
불가리아 출신 정치이론가 이반 크라스테브는 과거 ‘포함’의 수단이었던 민주주의가 이제는 ‘배제’의 수단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민족·종교·계급·성·언어 등에 따라 나뉜 집단들이 저마다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체성 정치’를 불러왔으며, 이에 따라 “민주주의는 소수의 해방에 찬성하는 체제에서 다수 세력을 보호하는 정치 체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독일 출신 사회학자 올리버 나흐트바이는 “서양 사회가 추구해온 ‘수평적 평등’이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발달로 나타난 ‘수직적’ 불평등과 맞물리면서 ‘탈문명화’라는 퇴행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결국 민주주의 위기의 배경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대안은 없다”며 전지구를 하나로 묶었지만, 번영과 안정의 약속은 지키지 못한 채 국가와 사회의 보호를 해체해버렸다. 이에 따라 극심해지는 불평등과 무한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이 민주주의 자체로부터 이탈해, ‘우리’를 보호하고 ‘그들’을 억압하려는 “부족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좌파·진보 진영이 보여준 무능에 대한 날선 비판들이다. 좌파·진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휩쓸려 다녔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됐단 얘기다. 미국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의 비판이 특히 매섭다. 그는 좌파·진보가 제구실을 못 하고 ‘진보 신자유주의’로 흘렀기 때문에, “반동 포퓰리즘과 진보 신자유주의 사이에 ‘홉슨의 선택’(대안 없이 주어진 것 중에서만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만이 남았다”고 말한다. ‘진보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평등에 반하는 능력주의를 진보와 동일시”하고,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에 친화적이며, 더 포괄적이고 평등주의적이어야 할 ‘해방’의 의미를 ‘자유개인주의’의 관점으로 축소하고 왜곡한 정치적 흐름이다.
프레이저는 빌 클린턴 때부터 대두된 이런 ‘진보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며, “트럼프를 뽑은 사람들이 거부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진보 신자유주의’였다”고 분석한다. 이탈리아 정치학자 도나텔라 델라 포르타는 “좌파가 자유시장을 옹호하고 좌파의 대안이 부족하다고 인식될 때, 사회보호의 전망을 독점으로 제시한 우파 쪽으로 무게중심이 극적으로 이동했다”고 지적한다. 좌파가 지지층을 결집시킬 수 있는 일관된 ‘서사’를 제시하지 못했거나, 노동계층의 분화 등 사회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들도 나온다.
그렇다면 ‘거대한 후퇴’를 막을 대안의 방향 역시 자명해진다. 진보·좌파의 제대로 된 복원이다. 지난해 미국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바람을 일으켰던 버니 샌더스, 빈사에 빠졌던 영국 노동당을 되살려낸 제러미 코빈, 그리스 급진 좌파 연합인 시리자와 스페인 좌파 정당 포데모스 등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또다른 행보들은,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앞으로 진보·좌파를 복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슬로베니아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요컨대 무게중심을 힐러리 클린턴에서 버니 샌더스로 옮기는 것”이라고 단적으로 말한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지제크 스스로도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를 너무 빠르게 바꾸려고 했다. 이제는 세계를 자기 비판으로 재해석하고 좌파의 책임을 검토할 때”라고 말한다. 독일의 사회경제학자 볼프강 슈트렉은 “그동안 지붕 위에 있는 비둘기(세계 공동체 민주주의)를 잡으려다가 손안에 있는 참새(국가 민주주의)를 놓친 건 아닌지 진지하게 숙고해야 한다”며 “사회 여러 층위에서 형성되고 있는 추이에 끊임없이 반응함으로써 좌파 보편주의의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현재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들은 요술 지팡이나 지름길이나 즉각 치유가 통하지 않는다”며 끊임없는 대화와 인내를 거쳐 온전하고 진정한 ‘장기적인 전망’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제는 고인이 된 지그문트 바우만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