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작가 무라카미의 신작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가 번역 출간되었다. 난징대학살에 대한 언급으로 일본에서 역사 논쟁에 휘말린 이 소설에 대해 한국 독자들은 어떤 평가를 내릴까. <한겨레> 자료사진
무라카미 하루키(사진)의 신작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한국어판(전2권, 홍은주 옮김, 문학동네 펴냄)이 마침내 출간됐다. 지난 2월 말 일본에서 나온 지 4개월여 만이다.
장편으로는 한국에서 4년 만에 나온 <기사단장 죽이기>는 하루키 소설의 핵심 요소들을 두루 갖춘데다 침략과 전쟁의 일본 현대사에 대한 비판적 언급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일본어판 출간 당시부터 화제와 기대를 모았다.
작품을 그리지 못하고 상품만 제작한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힌 30대 중반 초상화가 ‘나’는 6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해온 아내가 어느 날 문득 결별을 통보하자 발작적으로 차를 몰고 집을 나선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려는 걸까, 내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니, 그보다 나는 대체 어디로 와버렸을까? 여긴 대체 어디일까? 아니, 그보다 근본적으로 나는 대체 누구인가?”
음식점 화장실의 세면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자문하는 인물의 모습은 하루키 소설 독자라면 익숙한 장면이다. 거의가 남성인 작중 인물이 이렇듯 소중한 무언가를 잃고 익숙한 세계에서 떨려나, 여성 조력자의 도움으로 낯설고 초현실적인 세계에서 모험을 펼친 끝에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다는 설정은 얼마나 많은 하루키 소설들에서 반복되었던가.
미술대학 동창의 아버지이자 저명한 일본화가인 아마다 도모히코가 살던 산속 아틀리에에서 지내게 된 ‘나’는 그곳에서 아마다의 미발표작인 <기사단장 죽이기>를 발견한다. 검은 옷을 입은 청년 검객이 흰옷을 입은 노인을 칼로 찌르는 순간을 담은 이 그림을 통로 삼아 ‘나’는 그림을 그린 아마다의 개인사와 가족사, 그리고 그의 바탕을 이루는 일본 현대사 속으로 조금씩 들어가게 된다. 아마다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공부하던 시절 오스트리아인 연인과 함께 독일 점령 세력을 암살하는 지하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했지만,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연인이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한다. 게다가 음악을 전공한 동생 쓰구히코는 징집되어 중일전쟁에 참전했으며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무차별적 학살에 가담한 일을 괴로워하다가 결국 자살하고 만다.
소설 제목이 된 그림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풀어 가는 과정에서 골짜기 맞은편에 사는 백발의 남자 멘시키는 ‘나’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며, 잡목림 속 구덩이 아래에서 들리는 기묘한 방울 소리는 독자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한다. “기사단장의 모습을 빌려 내 앞에 나타난 이데아”와 ‘나’의 대화 역시 소설의 중요한 부분으로 구실을 한다. 클래식과 오페라, 재즈, 올드팝 등 다채로운 음악이 인물 및 이야기에 얽혀드는 것 역시 지극히 하루키답다. 소설 마지막 장에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에 대한 언급까지 나오는데, 이는 일본의 역사와 현실을 한꺼번에 감당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욕의 반영으로 보인다.
<기사단장 죽이기>가 지난 2월 일본에서 출간되었을 때, 난징대학살을 소설에서 언급한 것 때문에 일부 우익 독자들이 반발하고 그에 대해 하루키가 언론 인터뷰에서 반박하는 등 논란이 일기도 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 난징대학살을 가리켜 “일본군이 격렬한 전투 끝에 난징 시내를 점령하고 대량 살인을 자행했습니다. 전투 중의 살인도 있고, 전투가 끝난 뒤의 살인도 있었죠. (…) 중국인 사망자 수가 사십만명이라는 설도 있고, 십만명이라는 설도 있지요. 하지만 사십만명과 십만명의 차이는 과연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한 것을 두고 우익 누리꾼들은 “매국노”라는 표현으로 하루키를 비난했다.
그러나 하루키는 언론 인터뷰에서 “역사라는 것은 국가에 있어서 집합적인 기억이며 이 집합적인 기억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책임감을 갖고 짊어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며 “따라서 이를 과거의 일로 치부해 잊으려 하거나 (역사를) 바꿔 쓰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반박했다. 그는 “전후에 태어났다고 해서 내게 책임이 없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며 “소설가에게 가능한 일은 한정돼 있지만 이야기라는 형태로 (역사수정주의 움직임에 맞서) 싸워 나가는 것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기사단장 죽이기> 속 난징대학살 언급이 일본에서 논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거기에는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문학평론가 이명원(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은 이 소설의 일본어판을 읽은 뒤 지난 3월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이 소설이 전전(戰前) 일본과 독일의 군국주의를 고발하고 있는 작품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과거사의 증언과 침묵 사이에서 하루키가 “침묵의 진정성이라는 모순 쪽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 같다”며 “이 애매성이야말로 일본적 반성의 최대치이자 명백한 한계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사단장 죽이기> 한국어판은 지난달 30일 온라인 서점에서 예약판매를 시작해 예약판매만으로 온라인 4대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1, 2위를 기록했다. 출판사 문학동네는 초판으로 5만세트(10만부)를 준비했다가 예약판매 현황을 보고 2쇄와 3쇄 5만세트씩을 추가로 제작했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꼽히는 하루키의 신작이 다시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까. 소설에 표명된 하루키의 역사인식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는 어떻게 나올까.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