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적 민족문학의 독전관(督戰官)’이라고 황지우 시인은 그를 표현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문화활동가였던 채광석(사진·1948~87)을 가리킨 말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야전 사령관이라는 직접적이고 전투적인 호칭이 그에게는 더 어울렸다. 그는 스스로 싸움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피 흘리고 상처를 입었다. 그런 직접성과 헌신성 덕분에 그의 주장에 힘이 실린 것도 사실이었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를 목격한 1990년대 초 이후 민중문학이 힘을 잃고 비틀거릴 때, 후배 문인들이 그의 부재를 아쉬워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6월항쟁을 거쳐 노동자 대투쟁으로 넘어가던 87년 7월12일 새벽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채광석의 30주기를 맞아 한국작가회의(작가회의)는 12일 저녁 서울 대학로 굿씨어터에서 추모의 밤을 연다. 최원식 이사장의 인사말에 이어 소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 김진경 시인의 추도사가 예정됐다. 소 의원은 채광석이 작가회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총무간사이던 시절 기관지를 함께 냈다가 출판등록 취소 처분을 받는 등 고초를 겪은 인연이 있다.
이어서 유병록·최세운·이규배 등 후배 시인들이 채광석의 대표 시 ‘돌’ ‘절규’ ‘밧줄을 타며’를 낭송하며, 채광석과 함께 <시와 경제> 동인으로 활동했던 홍일선 시인의 추모시 낭송, 그리고 추모 노래와 춤 등의 공연이 펼쳐진다.
문학평론가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추모 강연을 한다. 미리 배포된 강연 원고에서 김 교수는 83년에 시와 평론을 쓰기 시작한 채광석을 두고 “83~87년 4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 시기의 변혁적 문학운동을 가장 강력하게 추동한 중심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채광석이 “민중문학에서의 민중주체의 문제를 최초로 부각시켰”으며 “민족문학이 바로 민중문학에 의해 구체화된다고 하는 입론을 세웠다”고 소개했다. 마지막 평론 ‘소시민적 민족문학에서 민중적 민족문학으로’(1986)에서 채광석이 민중적 민족문학론을 처음으로 ‘선언’했으며 “채광석이 던져 놓은 민중적 민족문학론이라는 화두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자신이 쓴 평론 ‘지식인문학의 위기와 새로운 민족문학의 구상’(1987)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앞서 11일 동료 문인들은 경기도 팔당 채광석의 묘소를 참배하며, 22일엔 충남 안면도 자연휴양림 안에 있는 채광석 시비를 답사할 예정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