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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고통 속에 춤추는 당나귀처럼

등록 2017-07-20 18:53수정 2017-07-20 20:13

오늘은 잘 모르겠어
심보선 지음/문학과지성사·8000원

심보선(사진)의 세번째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의 말미에는 ‘당나귀문학론’이라는 에세이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볼프강 에젤만이라는, 구글 검색에도 잡히지 않는 필자의 이 짧은 글은 여느 시집이라면 해설이나 발문의 몫이었을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시집에 대한 일종의 해설로 구실하는 셈이다. 심보선은 <한겨레> 2014년 11월21일치에 쓴 칼럼 ‘당나귀와 문학’에서 백석,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라몬 히메네스의 시와 에세이 등에 나오는 당나귀들을 열거한 다음, “나에게 당나귀가 있다면 (…) 몰래 삶을 빠져나갈 수 있는 동행자가 있다면”이라며 부러워한 바 있다. 이번 시집의 두번째 시 ‘당나귀’에는 스티븐슨의 당나귀 모데스틴과 히메네스의 당나귀 플라테로 등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당나귀라니? 그리고 당나귀문학론이라니?

‘당나귀문학론’에 따르면 당나귀는 고통 속에 춤을 추는 동물, 인내와 해방의 두 측면을 지닌 존재다. “꿋꿋이 인내하고 신나게 춤추면서 진실을 향해”,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누구도 가지 않는 방식으로 가”는 당나귀에게서 시인은 문학의 숙명과 본질을 엿본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래서 “모든 문학은 본질적으로 당나귀문학이다.” 모순의 공존, 예토와 정토의 일치가 문학의 본질을 이룬다는 뜻이겠다.

“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오늘은 잘 모르겠어”(‘오늘은 잘 모르겠어’ 부분)

“노동자는 노예가 아니에요./ 노동자는 우리가 소유한 근사한 기계들의 창조자랍니다.”(‘스물세번째 인간’ 부분)

이별과 상실의 쓰라린 혼란과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공서하는 이 시집의 세계를 당나귀문학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노동(자)의 가치와 역할에 대한 믿음은 자명하고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잃어버린 과거 또는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일. 우리는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 것처럼 인간적 가치의 세계로부터도 버림받고 내팽개쳐졌다. 구의역 소년 노동자의 죽음을 노래한 ‘갈색 가방이 있던 역’,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죽음의 연쇄를 다룬 ‘스물세번째 인간’ 같은 시에서 시인은 당위적 가치와 불구적 현실 사이에서 “길을 잇고 길을 잃”(‘예술가들’)는다.(당나귀문학은 완성이 아니라 과정의 예술이다.) 시집에는 ‘예술가들’ 말고도 ‘나는 시인이랍니다’ ‘나는 이제 시인이 아니랍니다’처럼 시와 예술, 시인과 예술가를 직접 언급한 작품이 여럿 보이는데, “아이 대신에 내겐(…)/ 시가 있다”며 “죽지 않기 위해 시를 썼다”(‘축복은 무엇일까’)는 시인의 시에 대한 고민과 자부를 엿볼 수 있다.

최재봉 기자,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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