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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팍 그차질 때 터지는 그 소리, 숨비소리”

등록 2017-07-20 19:46수정 2017-07-20 20:12

제주 시인 허영선 시집 ‘해녀들’
해녀항쟁에서 현재까지 삶 그려
“해녀들은 물에 시를 쓰는 이들”
해녀들
허영선 지음/문학동네·8000원

시로 쓴 해녀 열전. 시집 <해녀들>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지은이는 제주의 여성 시인 허영선.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겠나. “이제서야 제주도의 삶으로부터 제주도의 시가 세상의 형식 위로 솟아올랐다”는 고은 시인의 추천사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허영선은 1980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해 1983년 첫 시집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을 선보였다. 그로부터 무려 21년 만인 2004년 두번째 시집 <뿌리의 노래>를 냈고, 다시 13년 만에 세번째 시집 <해녀들>을 묶어 낸 것. <제민일보> 편집부국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제주4·3연구소장 및 제주대 강사로 분주한 바깥 활동 탓이리라 짐작된다. 어쨌든 세 시집의 제목만으로도 허영선 시 세계의 출발과 지향을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어려서 적적/ 늙어서도 적적/ 허니 숨비질이지/ 비 오는 바당도 적적/ 과랑과랑 몸 푸는 대낮도 적적/ 그러니 노래하지/ 담배 태우듯 숨비질하지// 안개 너머 그리운 너를 향해/ 두서없이 편지를 쓰듯/ 물로 뱅뱅 노래하지”(‘해녀 홍석낭 1’ 부분)

바당이란 바다의 제주말. 제주 해녀들이 숨을 참고 오래도록 물질을 하다가 마침내 물 밖으로 나와 비로소 큰 숨을 내뿜을 때 나는 소리를 숨비소리라 하니, 숨비질이란 곧 해녀의 물질을 가리키는 말. 과랑과랑은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모습을 뜻한다. 표준어로는 대체하기 힘든 제주 토박이말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시들은 해녀들 삶의 역사와 현실을 지근거리에서 보여준다.

“제주의 날자연과 해녀들 삶의 강인한 이미지가 어울린다고 봅니다. 해녀들은 한낱 구경거리나 관광 대상이 아니에요. 자신의 삶을 물에 쓰는 존재이고, 우리가 이름을 불러줘야 할 이들이죠. 애정을 갖고 오랫동안 품었던 해녀 시를 이렇게 책으로 묶고 나니 부채를 갚은 듯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느낌입니다.”

시집 <해녀들>을 낸 허영선 시인. “해녀들은 해마다 100명 정도씩 줄어들어 지금은 4천여명밖에 남아 있지 않다”며 “나이 든 해녀들의 경험과 해녀학교 등의 현대화 노력을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허영선 시인 제공
시집 <해녀들>을 낸 허영선 시인. “해녀들은 해마다 100명 정도씩 줄어들어 지금은 4천여명밖에 남아 있지 않다”며 “나이 든 해녀들의 경험과 해녀학교 등의 현대화 노력을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허영선 시인 제공
19일 전화로 만난 허영선 시인은 “시집에 등장하는 해녀들을 대부분 직접 만나 생애 이야기를 들었다”며 “그들의 삶을 시로 감히 어떻게 표현할까 두렵기도 했지만, 어쨌든 독자들이 이 시집을 통해 해녀의 정신과 근간을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시집 앞부분에는 1931~2년 해녀항쟁 주모자들인 김옥련과 고차동, 그리고 1948년 4·3사건에 관련된 해녀들에 관한 시가 배치되었다.

“모아모아 집중 폭우처럼 끓어오르자/ 이윽고 숨죽였던 생애 첫 파도가 과짝 일어섰네”(‘해녀들’ 부분)

“이미 물의 지옥 견뎌본 자,/ 바당 물질 그만큼만 참으면 되지/ 견딜 만큼 견디다 숨비소리 내면 되지”(‘해녀 김옥련 2’ 부분)

표제작 ‘해녀들’에서 부당한 처우에 맞서 일어선 해녀들의 봉기, 그리고 ‘해녀 김옥련 2’에서 그 봉기 주모자 김옥련이 붙잡혀 가 물고문을 당할 때의 각오는 모두 해녀들의 물질과 숨비소리에 견주어진다. 물질의 고통과 민족사의 아픔이 한몸이 된 형국. “해녀항쟁은 일제강점기에 드물었던 집단적 투쟁으로, 해녀들의 뜨거운 기질을 보여준다”고 허영선 시인은 말했다. “동시에, 해녀들이 숨이 끊어지려는 찰나에 터뜨리는 숨비소리는 극한에 가까운 그들의 생존 조건과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삶의 가치를 알게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하나의 호흡이/ 하나의 호흡을 마시며 몸을 뒤튼다/ 다섯의 여자와 바다가 한몸이 된다/ 허우적 무엇을 붙잡는가/ 온 가슴의 끝에서 내뱉는다/ 염주알처럼 알알이/ 흩어진 것들/ 염주알처럼/ 흩뿌려지는 무리들/ 흩어지는, 새를 좇는 소리들/ 바다 위로 흩어지고 흩어진다”(‘바닷속 호흡은 무엇을 붙잡는가’ 전문)

해녀들은 보통 여럿이서 함께 물질을 한다. 그러나 “함께 물에 들어도 저만의 목숨이다.”(시인의 산문 ‘그들은 물에서 시를 쓴다’) 극한 중의 극한인 물 아래 삶을 택하고자 하면 사랑이 필수적이다. “사랑을 품지 않고/ 어찌 바다에 들겠는가”(‘사랑을 품지 않고 어찌 바다에 들겠는가’). 물 밖 우리네 삶이 그와 같다. “숨이 팍 그차질 때 터지는 그 소리/ 숨비소리”(‘시인의 말’)를 듣노라면 “막막하고 팍팍한 삶을 견딜 힘과 위안을 얻는다”고 시인은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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