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신용목 지음/창비·8000원
오르페우스와 롯의 아내는 금지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소금기둥이 되는 벌을 받는다. 돌아보는 일의 위험성이 무릇 그러하다. 그런데 시인은 겁도 없이 뒤를 돌아보았노라 당당하게 말한다. 그것도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반응해서가 아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심지어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돌아보았다”는 것 아닌가. 신용목(사진)의 네번째 시집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의 표제작인 ‘모래시계’ 얘기다.
‘돌아보다’라는 말은 고개를 돌려 뒤를 본다는 뜻과 함께, 지난 일이나 주변을 살펴본다는 뜻을 지닌다. 성찰과 반성, 관찰과 염려의 뉘앙스를 품은 것이다. 자신을 부르는 아는 이의 목소리가 아님에도 굳이 뒤를 돌아보는 행위는 인칭과 관계의 테두리를 넘는 적극적인 관심과 개입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 점을 가장 극적으로, 그리고 감동적으로 그린 시가 ‘공동체’다. 이렇게 시작하는 작품이다.
“내가 죽은 자의 이름을 써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내가 그의 이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오늘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으니/ 나의 이름은 갈수록 늘어나서, 머잖아 죽음의 장부를 다 가지고// 나는 천국과 지옥으로 불릴 수도 있겠습니까?”
양해를 구하는 외양을 띠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양해라기보다는 각오와 다짐으로 읽힌다. 죽은 이의 이름을 산 자가 가져다 쓰겠노라는 것은 권리나 특혜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부담과 책임의 역설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용산참사와 쌍용차, 세월호, 그리고 다른 숱한 죽음의 연대기와 이웃해 살면서 그 원통한 죽음들을 잊거나 빼앗기지 않고 나의 일로 챙겨 지니겠다는 의지를 이런 도발적 질문에 담은 것이다. 죽은 이의 이름을 가져다 쓰겠다던 시인이, 자신의 이름을 죽은 이에게 주겠노라 밝히는 이 시의 마지막 연은 그런 역설의 완성이라 하겠다.
“인생이 가능하다면, 오직 부르는 순간에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뜨는 것처럼/ 사랑이 가능하다면,/ 죽은 자에게 나의 이름을 주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그를 내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죽음을 다시 구분해서 죽은 죽음과 산 죽음으로 나눌 수 있다면, 그렇게 이름을 부르고 나누는 일은 죽은 자를 삶 쪽으로 되끌어오는 행위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로를 기억하는 사람 또한/우리”(‘우리라서’)이며 “내가 아직 사랑하고 있으므로… 그는 죽은 것이 아니”(‘영화는 밤에 자는 낮잠 같다’)기 때문이다.
최재봉 기자, 사진 창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