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는 지금
천수이볜 대만 총통은 지난 9일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떠오르고 있는 데 맞서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에서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일본이 “정치, 군사면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면서, 유엔 평화유지활동 참여폭을 넓히고 역내 각국간의 전략적 균형을 유지하는 “균형자(밸런서)” 역할을 하라며, 개헌논의에 대해서도 자위대의 역할 확대라는 관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역할을 어서 확대하라는 얘기다.
미국 일본 두 나라는 지난 2월 안전보장협의위원회(외교·군사 분야 장관 등 고위급 연례회의. 이른바 ‘2 플러스 2’)에서 주일미군 재편을 위한 공통전략목표의 하나로 “대만해협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처음으로 명시했고, 천 총통은 이에 대해서도 “감사한다”고 밝혔다. ‘평화적 해결’이란 중국이 무력으로 대만을 ‘병합’하지 말라는 것이고, 만약 그렇게 하면 가만 있지 않겠다는 경고다.
1943년 11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장제스 중국 대원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이집트 카이로에서 발표한 ‘카이로 선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개시 이후 일본이 탈취하고 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섬들을 박탈하고, 만주와 대만, 팽호열도처럼 일본이 청국인한테서 빼앗은 모든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하며, 또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다른 모든 지역에서 일본을 몰아낼 것이다.” 따로 “조선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면서 적절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하고 독립시키겠다”는 결의도 넣었다.
몇년 뒤 장제스가 대만으로 쫓겨난 뒤 상황은 바뀌었지만, 1971년 유엔 총회에서 중국의 유엔 복귀와 대만 탈퇴(사실상의 축출) 결정이 내려지고 미국·일본이 중국과 앞다퉈 수교하면서 카이로 선언의 틀은 유지됐다. 이제 다시 세월이 흘러 미국은 대만 등을 ‘빼앗은’ 일본과 다시 손을 잡고 아직 대만을 ‘반환’받지 못한 중국과 대결하는 상황이 돼가고 있고, 장제스 대신 천수이볜이 이끌고 있는 대만은 식민종주국 일본에게 다시 ‘보호’를 요청하는 지경이 됐다.
충돌하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경계면에 놓여 있기로는 대만과 한반도가 다를 바 없고, 약하면 쉼없이 양쪽 눈치를 보며 살거나 결국 한쪽에 먹히게 되는 처지에 빠진다는 점도 비슷하다. 다만 대만은 중국에 반환돼야 할 땅이었고, 조선은 독립국이었다. 독립국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대만과 같은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단돼 있기 때문이다. 분단극복 없이는 ‘대만적 한계상황’을 벗어나기 어렵다. 혹자는 ‘통일’보다는 ‘평화’가 우선이라며 통일론자를 철없는 이상주의자로 몰지만, 그 평화조차 우리 선택이 아니라 외부의 힘에 좌우되는 상황이라면 평화우선론이야말로 위기가 상존하는 ‘대만적 한계상황’을 체질화하는 현실추수로 전락하지 않을까.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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