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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실패한 천재 예술가’와 가난한 대학생의 만남

등록 2017-08-24 18:58수정 2017-08-24 19:54

정미경 유작소설 ‘가수는 입을 다무네’
좌절한 천재 다룬 다큐 제작과정 통해
예술과 삶, 가난 등 다층적으로 그려
가수는 입을 다무네
정미경 지음/민음사·1만3000원

<가수는 입을 다무네>는 올해 1월 57살을 일기로 타계한 소설가 정미경의 유작 장편이다. 2014년 <세계의문학>에 연재한 작품인데, 퇴고를 위해 작가가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주인공 이경 모녀의 대화로 문득 끝나는 마지막 장면은 얼핏 중동무이의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소설 내적 논리로는 지극히 합당해 보이기도 한다.

무릇 유작이란 어느 정도는 읽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마련인데, 이 소설의 경우에는 기형도의 시에서 가져온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입을 다문 가수라는 이미지에는 고인의 이른 죽음이 포개진다. 등장인물인 가수 율이 세상을 떠나는 소설 말미의 설정을 모종의 참언(讖言)으로 읽고자 하는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

소설은 대학생 이경이 과제로 제출하고자 가수 율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 과정을 중심으로 짜였다. 인디 밴드로 출발했지만 이내 명예와 인기를 얻고 한 시대를 구가했던 율은 추문과 소문, 그리고 창조적 영감의 쇠락에다가 지독한 우울증의 협공으로 오래전부터 제 방에 틀어박힌 상태다. 이경은 율과 가까운 친구의 도움으로 그의 집을 들락거리며 율을 인터뷰하고, 이경과 인터뷰를 하는 동안 율 역시 제 안의 감옥에서 벗어나 다시 노래를 만들고 세상과 만날 용기를 얻는다.

명백히 율을 가리키는 제목, 그리고 이경이 율을 대상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찍는 상황 때문에 율을 주인공 삼은 일종의 예술가 소설로 이 작품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극적인 상승과 추락을 연이어 경험한 뒤 오래 침잠했던 예술가가 재기를 위해 몸부림치다 결국 스러지고 마는 이야기가 소설의 뼈대를 이루기 때문이다. 자신과 세상 사이에 벽을 쌓고 틀어박혔던 율이 한갓 애송이에 지나지 않는 이경의 카메라 앞에 자신을 내놓기로 작정한 데에는 무용가 피나 바우슈를 다룬 빔 벤더스 다큐멘터리의 영향이 작지 않았다. ‘나도 저렇게 찍어 준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여 율은 촬영에 응했고, “피사체를 변형시키지 못한 다큐는 실패한 다큐”라고 율의 아내 여혜는 이경을 압박하듯 말했다.

올해 1월 타계한 소설가 정미경. 유작이 된 장편 <가수는 입을 다무네>에는 ‘작가의 말’을 미처 못 썼지만, 2010년에 낸 <아프리카의 별> ‘작가의 말’에서는 “우리 모두는 자신의 주관 속에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는 자들이 아닌가”라고 썼다. 김병종 교수 제공
올해 1월 타계한 소설가 정미경. 유작이 된 장편 <가수는 입을 다무네>에는 ‘작가의 말’을 미처 못 썼지만, 2010년에 낸 <아프리카의 별> ‘작가의 말’에서는 “우리 모두는 자신의 주관 속에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는 자들이 아닌가”라고 썼다. 김병종 교수 제공

이경의 다큐 촬영 과정에서 확인되는 율의 면모는 ‘좌절한 천재’와는 많이 다르다. 가령 “무지개처럼 느닷없이 떠오른 악상에선 특유의 향이 뭉클뭉클 날 때가 있”고 “그 무지개가 스러지기 전에 숨도 쉬지 않고 기록하고 나면 더 이상 고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하는데, 실제로 그가 작성한 악보에는 여러 군데가 뭉개졌다가는 되살리겠다는 동그라미 표시가 어지럽다. 절대음감을 자랑하며 제 입으로 자신을 천재라 강조하던 그는 막상 라이브 공연에서는 키를 높게 잡거나 음을 놓치는 식의 실수를 거듭한다. 결정적으로 오랜 침묵 끝에 그가 다시 선보인 노래에는 지난 시절 경탄과 공감을 자아냈던 그만의 개성과 매력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실패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실패한 천재 예술가를 다룬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이경의 카메라에 잡히는 율의 면모에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그런 율을 촬영하는 이경의 작업을 둘러싼 이야기가 소설에서 크게 부각된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율이 아니라 이경인 것이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카페 아르바이트와 과외 등에 시간을 빼앗기고, 착하고 헌신적인 남자친구 현수와 제대로 된 연애도 못하면서, 오로지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학점을 목표로 율의 다큐멘터리에 매달리는 가난한 대학생 이경. “삶이란 내던져진 미로에서 살아 나가는 일이고 무작정 걸어야 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믿지만 “날마다 고층 빌딩과 빌딩 사이 천공을 맨몸으로 건너뛰듯 가파른” 사정을 자기 자신에게나 호소할 뿐인 이경의 몸부림은 그 절실함에서 율의 예술적 고뇌 이상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와 함께 “시야에 등장하는 순간 생의 달콤함 외의 온갖 골칫거리를 일시에 격파해 버리는 무한 긍정의 존재” 현수, 그리고 일찍이 어린 딸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가 늙고 쇠약해진 뒤에야 다시 의지해 오는 엄마 등 주변 인물들이 엮어 내는 다층적인 이야기는 이 소설이 예술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상과 인생에 관한 것임을 알게 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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