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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일상의 구체성을 담는 일, 고통스럽지만 내가 가야 할 길”

등록 2017-09-03 15:45수정 2017-09-03 19:23

소설가 김훈 ‘소설낭독캠프’ 강연
“자유경제에는 약탈의 바탕 있어”
칠곡에서 독자 80여명과 1박2일
소설가 김훈이 1일 오후 경북 칠곡 송정 자연휴양림에서 열린 ‘소설 낭독 캠프’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소설가 김훈이 1일 오후 경북 칠곡 송정 자연휴양림에서 열린 ‘소설 낭독 캠프’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우리 동네 일산에 24시간 영업하는 짬뽕집이 둘 있는데, 한 집은 한 그릇에 9천원이고 다른 집은 같은 짬뽕이 3천원입니다. 9천원짜리 짬뽕은 맛있어요. 주꾸미 같은 좋은 재료가 들어 있거든요. 3천원짜리는 사람을 위로하는 기능은 없고, 국물이 목구멍을 쥐어뜯으며 내려갑니다. 이 짬뽕을 돈 없는 젊은이들이 밤새 먹고 갑니다. 이것은 약육강식은 아니죠. 누가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요. 시장의 평화, 시장의 질서 같은 것이죠. 그런데 이것이 과연 인간이 추구해야 할 마지막 사회의 모습인가, 그에 의문을 제기하는 게 인문주의예요. 이런 것이 자유로운 교역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약탈의 바탕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나는 가지고 있어요.”

소설가 김훈이 1일 오후 경북 칠곡 송정자연휴양림에서 독자 80여명과 만났다. 이야기경영연구소와 칠곡군이 주최한 ‘소설 낭독 캠프’에 참가한 그는 ‘소설과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한 강연에서 자신의 70년 삶과 우리 사회, 문학과 현실의 관계 등에 관한 생각을 펼쳐 놓았다.

“지난 여름은 너무 더워서 글은 못 쓰고 책만 읽으며 보냈습니다. 김득신이라는 조선시대 선비의 글을 읽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비평가예요. 책을 하도 많이 읽어서 서재 이름을 ‘억만재’로 지었을 정도였죠. 그가 살던 시절 팔도에 기근이 들어 500만 인구 가운데 100만명이 굶어 죽었는데, 그는 그 와중에도 책만 읽다가 결국 화적들에게 끌려가 죽었습니다. 그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 읽기와 글쓰기, 그리고 인간 현실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생애였다고 생각합니다.”

소설가 김훈이 2일 오후 경북 칠곡 송정 자연휴양림에서 열린 ‘소설 낭독 캠프’ 폐막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소설가 김훈이 2일 오후 경북 칠곡 송정 자연휴양림에서 열린 ‘소설 낭독 캠프’ 폐막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훈은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 같은 서양 고전을 읽은 느낌과 일연의 <삼국유사>를 대비시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이 책들을 보면 역사란 전쟁이더군요. 전쟁이 아닌 역사는 없습니다. 전쟁과 살육에 관한 죄의식도 없어요. 그런데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는 같은 역사책이라도 인간의 마음에 관한 책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마음이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요. 그 점이 역시 전쟁의 역사인 <삼국사기>와 다른 점이죠. 경주가 적의 침략을 받아서 황룡사도 불에 탔는데, 일연 스님은 그런 피해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안 씁니다. 황룡사를 처음 구상했을 때 느꼈던 화해와 평화의 꿈에 대해 썼을 뿐이에요. 전쟁에 의해 무너질 수 없는 인간의 꿈을 쓴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죠.”

김훈은 이어 얼마 전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가까이에서 본 경험을 들려주며 “맹수를 사냥하고 고래를 잡는 등 일상의 구체성을 담은 암각화를 보면서, 저런 삶의 모습을 쓰는 것이 내 소설과 삶을 밀착시켜 나가는 길이 아닌가 하는 행복한 생각을 했다”고 소개했다. “그것을 원고지 위에 그려 내는 것은 고통스럽고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래도 내가 가야 하는 길”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강연에 이어 마련된 북토크에서 그는 신작 <공터에서>를 쓰게 된 계기, 그 소설의 모티브가 된 아버지 김광주 이야기,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문장의 요건 등에 관한 생각을 들려주었다. 참여한 독자들은 소설 <남한산성>의 주제와 지금 한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 사이의 연관성, 촛불집회 이후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을 모신 관기 여진이 실존인물인지 등을 질문하고 작가의 답을 들었다. 산후조리원에서 일한다는 독자 이순옥씨는 봄꽃의 개화와 낙화 과정을 쓴 김훈의 매우 긴 산문을 암송해서 참가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캠프 이틀째인 2일엔 뮤지션 제갈인철과 강고은이 <공터에서>와 <라면을 끓이며> 같은 김훈의 소설과 산문으로 만든 노래로 콘서트를 펼쳤고, 독자들이 반별로 준비한 김훈 작품 낭독 대회도 이어졌다. 친구들과 함께 <남한산성> 일부를 낭독해 대상을 받은 독자 정희숙씨는 “연습 시간이 많지 않아 아쉬웠지만 무척 재미있고 신선한 경험이었다”며 “좋아하는 작가도 가까이에서 보고, 선생님 소설로 만든 노래도 인상적이었고, 매우 행복한 경험이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칠곡/글·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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