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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영 페미니스트 ‘내가 원하는 유토피아로 갈 거야’

등록 2017-09-07 19:01수정 2017-09-08 00:41

아내들의 학교
박민정 지음/문학동네·1만3000원

박민정(사진)의 두번째 소설집 <아내들의 학교>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 강화길의 장편 <다른 사람>과 함께 ‘영 페미니즘의 목소리’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사회 문제가 되었던 강남역 살인 사건과 문단 성폭력 등에 맞서는 젊은 여성 작가들의 대응을 이 작품들에서 만날 수 있다.

<아내들의 학교>에 실린 일곱 중단편에는 강간과 몰래 카메라, ‘묻지 마’ 살인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속출한다. 그러나 그런 범죄를 대하는 여성 등장인물들과 작가의 태도는 단순한 고발과 분노, 징치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피해자와 가해자, 증인과 관찰자의 복합적 시점이 박민정의 소설에 다층적인 결을 부여한다. 또, 남성과 여성 사이 이분법적 대립에서 벗어나 역사적·민족적 배경과 세대론적 맥락이 곁들여지는데, 이 경우에도 민족간·세대간 알력만이 아니라 민족과 세대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해와 포용을 향해 열려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올해 문지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행복의 과학’은 일본의 베스트셀러 <류의 이야기: 행복의 과학> 한국어판을 편집하는 출판사 직원 하나를 주인공 삼는다. 일본인 저자 기노시타 류는 신흥 종교 ‘행복의 과학’에 입교했다가 뛰쳐나온 인물이며 저명한 광고영화 감독 기노시타 히로무의 손자이기도 하다. 류의 아버지 미노루는 자신의 아버지 히로무가 과거 한국에 현지처를 두었던 사실에 분개해 한국 여성을 살해한 바 있는데, 한국어판 편집자 하나가 다름 아닌 히로무의 딸이라는 사실은 우연 치고도 얄궂게 읽힌다.

중편 ‘A코에게 보낸 유서’는 ‘행복의 과학’에 이어지는 이야기다. 하나가 편집해서 낸 류의 책 한국어판은 기대만큼 팔리지 않았는데, 이 작품에서는 미노루에게 살해당한 한국 여성 박영희의 일기 그리고 하나가 우연히 교토의 조선인 학교를 방문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제목은 미노루의 고교 시절 친구인 조선인 유타로가 겁탈한 조선인 여학생 영자, 그리고 박영희를 아울러 가리킨다(영희와 영자는 둘다 ‘에이코’로 발음된다).

하나의 출판사 선배인 수영은 회사의 치부를 공개했다가 사장에게 밉보여 사직 압력과 부당전보 같은 탄압을 받는다. 후기에서 작가도 밝혔지만 2015~6년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던 편집자 윤정기씨의 경우를 떠오르게 한다. 공장 노동자였던 박영희의 이야기를 통해 90년대 초 대학생 출신 노동운동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작가는 ‘천사는 마리아를 떠나갔다’에서도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해 심신이 망가진 대학생, 그리고 부당한 처우에 반발해 분신을 시도하는 시내버스 여차장 등 부모 세대의 뜨거웠던 청년기를 되살려낸다. ‘버드아이즈 뷰’에서 보수 청년의 탄생담을 들려준 작가는 ‘청순한 마음’에서는 학생에 대한 교수의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본의 아니게 가해자의 편에 서게 된 여성을 등장시킴으로써 사태의 본질도 인간의 본성도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인식을 보인다.

표제작 ‘아내들의 학교’는 또 다른 결을 지닌 작품이다. 아이를 입양해 키우는 레즈비언 커플 선과 설혜의 이야기인데, 모델인 선이 텔레비전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방송국은 선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적극 활용하려 하고, 선과 설혜는 고민 끝에 카메라의 관음증적 시선 앞에 자신들의 삶을 내보이기로 한다. 이런 현재의 이야기와 함께 설혜의 대학 시절 성 소수자 운동을 하는 선배들에 의해 자신의 성 정체성이 반강제로 까발려졌던(아우팅) 일이 회고되면서 소설은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다층적 울림을 준다. “잊지 마. 이것이 내가 원한 유토피아였다는 걸”이라는 마지막 문장의 아이러니 효과도 강렬하다.

최재봉 기자, 사진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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