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길이 되려면-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동아시아·1만8000원
보건학 분야에서 오래된 질문이 있다. “태아기의 경험이 사람의 일생에 얼마만큼 영향을 끼치는가?” 태아기의 성장 환경을 조작할 수 없다는 윤리적 장벽과 수십년의 연구 기간 때문에 좀처럼 과학적 답변을 내놓지 못하던 이 질문에 대한 답이 1990년대 이후 역학자들을 통해 하나둘 제출되기 시작한다. 역사 속에선 전쟁이나 지리 등의 영향으로 특별한 환경이 조성되는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었다. 아프리카 잠비아에선 7~10월 우기가 과거 한국의 보릿고개처럼 식량은 바닥나고, 말라리아 같은 병은 창궐하는 시기다. 연구자들은 우기에 태어난 잠비아인들과 식량이 넉넉한 건기에 태어난 잠비아인들에 주목했다. 연구 결과 40살이 넘어가자 이들 간의 생존율 차이가 2배 넘게 났다. 또 다른 사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독일 나치 군대의 봉쇄작전으로 네덜란드에선 6개월간 식량과 연료가 끊기는 일이 있었다. 이 기간 어머니 배 속에 있던 이들은 심장병에 걸릴 위험이 다른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에 비해 3배, 조현증은 2.6배가 늘어났다고 한다.
이처럼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사회 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더 건강히 오래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학문”을 ‘사회역학’이라고 한다. 이 학문의 역사는 짧아서 2000년에야 처음으로 교과서가 나왔고, 불과 10여년 전부터 하버드대 등 세계 유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주기 시작한 신생 학문이다. 1953년 발견된 유전자(DNA) 이중나선 구조로 질병의 원인을 유전자같이 개인 단위에서 찾는 연구가 주류를 이뤄왔고, 미-소 냉전 시기 매카시즘 등의 영향으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사회구조적 원인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인 최성국씨가 2014년 11월8일 저녁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한 공장 구석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담배를 태우고 있다. 최씨는 원래 담배를 피울 줄 몰랐지만, 2009년 8월 쌍용차에서 해고된 뒤 담배를 시작했다. 화성/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이 때문에 한국에도 사회역학자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그중에서 김승섭(38)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보건정책관리학부 부교수는 2013년 고려대에 부임해 2015년 ‘쌍용차 해고노동자 건강’, ‘소방공무원 인권상황’, 2016년 ‘동성애자/양성애자 건강’, ‘세월호 특조위 단원고 학생 생존자 및 가족 대상 실태조사’ 등 굵직한 사회역학 연구를 주도한 신진 연구자다. 그가 쓴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사회역학이라는 흥미롭고도 중요한 학문에 대한 대중 입문서다.
김 교수가 이런 사회역학의 시선으로 본 한국은 어땠을까. 한국 노동자가 겪는 차별 경험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의 한 대목을 보자. 설문조사에서 구직 과정에서 차별을 경험했는지 묻는 말에 ‘해당 사항 없음'이라고 답한 여성 노동자들이 ‘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한 이들보다 오히려 건강 상태가 더 나빴다(2.07 대 1.63). 예상과 다른 이런 답변에 김 교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짐작한다. “여성 노동자가 구직 과정에서 혹은 일터에서 차별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것이 남성에 비해 더 어렵고 예민한 일임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그는 2012년에 진행됐던 전국 다문화가정 실태조사 결과를 분석하다가 다시 비슷한 상황에 대면한다. 다문화가정 청소년 3627명에게 학교폭력에 관해 물었을 때,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다’고 답한 남학생들은 ‘학교폭력 경험 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답한 남학생들보다 우울 증상 유병률이 높았다(8.34 대 7.05). 김 교수는 “상처받았고 괴롭지만, 자신에게 ‘별거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애써 노력했던 것이 오히려 더 큰 아픔의 원인이었다”며 “한국처럼 남자가 힘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남자라면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어쩌면 그들은 ‘강한 남자’로 보이기 위해 자신을 속인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김 교수의 연구는 한국 사회가 겪은 큰 아픔을 비켜 나갈 수 없었다. 2015년 쌍용차 노조 김득중 지부장의 요청으로 정리해고 6년 만에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2009년 77일간의 ‘옥쇄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208명이 참여한 설문조사에서 105명(50.5%)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는 것으로 분류됐다. 같은 도구를 사용해 측정한 1990년 제1차 걸프전에서 전방에서 전투에 참여한 쿠웨이트 군인(22%)만이 아니라 이라크군에게 포로로 잡힌 쿠웨이트 군인(48%)보다 더 높은 수치였다. 이 잔인한 숫자가 오류가 아님을 증명하듯, 쌍용차에선 현재까지 29명이 가장 많게는 자살로, 그다음으론 뇌출혈, 심장마비 등으로 사망했다.
이런 이전의 연구를 토대로 김 교수가 집중해 연구한 부분은 국가가 실업자들에게 한 역할이었다. 정리해고 이후 구직활동을 한 이들 중 62%가 취업 등 교육이나 직업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고 답했다. 구직 과정에서 정부고용센터의 도움을 받은 이는 8명(9.1%)뿐이었고, 대부분은 친구, 동료 해고자, 가족의 도움을 받았다. 김 교수는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삶은 해고로 직장을 잃었을 때 기댈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한 한국 사회에서 그 짐을 해고자와 그 가족이 온전히 떠안게 된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줬다”고 지적한다.
세월호 참사에서 살아 돌아온 학생들의 실태조사를 그가 맡은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세월호 특조위)에서 2016년 1월부터 진행한 실태조사의 책임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만난 생존학생들은 “마치 거미줄에 얽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정부가 생존학생을 모아 진행한 중소기업연수원 치유 프로그램에선 오전에는 참사 경험을 이야기하고, 오후에 그 아픔을 희망으로 승화하자고 하는 식의 프로그램을 8주간 반복했다. 정부는 피해자와 협의 없이 대학 특별전형을 발표했고, 사람들은 기사에 ‘친구는 죽었는데 너는 좋은 대학 가서 좋겠다’고 댓글을 달았다. 김 교수는 “정부 지원은 내용과 방식에 상관없이 항상 감사히 받아야 하고, 가끔 웃을 일이 생겨도 미소 짓지 말아야 하고, 화내면 안 되는 선량한 피해자 모습을 강요받고 있었다”고 전했다.
이런 한국에 그가 소개하는 ‘로세토 마을 연구’는 울림이 크다. 1960년대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모인 ‘로세토’ 마을은 같은 이탈리아 이민자 마을인 ‘방고’에 비해 심장병 사망률이 절반도 되지 않았다. 이 마을의 특별한 점은 니스코 신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동체 문화였다. 니스코 신부는 극도로 적은 임금을 받는 채석장 근로자들을 모아 노조를 만들고 스스로 노조위원장이 돼서 파업을 이끌기도 한 열정적 인물이었다. 이 마을에선 누군가가 죽으면 모든 주민이 애도하며 남겨진 자녀들을 함께 돌보는 문화가 있었다.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돈을 쓰고 공동체에 관심 없는 이들은 무시했다. 하지만 60년대를 기점으로 점점 자본주의 이념이 마을에 들어오고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심장병 사망률은 결국 방고 마을과 비슷해진다. 김 교수는 “로세토 이야기는 개인이 맞닥뜨린 위기에 함께 대응하는 공동체, 타인의 슬픔에 깊게 공감하고 행동하는 공동체의 힘이 얼마나 거대하고 중요한지 질문을 던진다”고 말한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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