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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북한 주민들이 주도한 ‘아래로부터의 시장화’

등록 2017-09-21 19:28수정 2017-09-21 20:02

북한 전문가 헤이즐 스미스
‘미친 국가’ 편견 걷어내고
북한의 실질적 변화에 주목
“국가 아닌 주민들이 주역”

장마당과 선군정치
-‘미지의 나라 북한’이라는 신화에 도전한다
헤이즐 스미스 지음, 김재오 옮김/창비·2만5000원

언론매체들은 북한을 ‘핵무기에 미친 지도부와 이에 세뇌되어 병정처럼 절대 복종하는 주민들’로 바라보곤 한다. 그러나 북한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친 국가’로 취급하는 것은 실제 사실에 눈감게 만드는 공허한 관점에 불과하다.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연구학원(SOAS) 한국학센터 연구교수인 헤이즐 스미스는 2015년 펴낸 <장마당과 선군정치>에서 북한이 여느 나라처럼 과학적·학문적으로 분석 가능한 나라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2년 넘게 북한에 체류하는 등 지난 25년 동안 현장과 자료를 넘나든 조사가 분석의 토대가 됐다.

지은이의 결론부터 말하면, 오늘날 북한은 ‘아래로부터의 시장화’와 ‘위로부터의 핵무장’이 교차하는 나라다. 특히 주목하는 것은 2000년대 이후 북한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주민들이 주도해온 ‘시장화’ 경향이다. 온갖 편견과 클리셰를 걷어내고 이 사실을 바로 보는 것만이 북한과 관련해 제대로 된 정책을 만들 실마리라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지은이는 과거 민족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삼고 지도자를 정점에 둔 북한의 정치권력이 모든 사회를 체계화해 다스리려 했던 ‘김일성주의’ 시기와, 그것이 실패한 뒤 90년대 새롭게 나타난 ‘선군정치’ 시기를 크게 구분해 바라본다. 두 시기 사이에는 김일성주의의 실패가 있다. 냉전 종식으로 체제 유지에 위협을 느낀 김씨 가문 지도부는 ‘핵무장’을 염두에 둔 핵개발 프로그램 등 정권 안보에만 몰두했는데, 그 결과 경제 영역에서 엄청난 실패를 경험했다. 공업과 농업 생산이 곤두박질쳤고, 식량배급 체계가 붕괴돼 대부분 주민은 극심한 기근을 겪어야 했다. 1993~1998년 사이 100만명이 죽었다. 유엔개발계획은 1992년과 1996년 사이 북한의 1인당 소득이 1005달러에서 481달러로 줄었다고 추산한다.

2004년 북한 평양에 있는 통일시장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모습. AP/연합뉴스.
2004년 북한 평양에 있는 통일시장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모습. AP/연합뉴스.
2004년 북한 평양에 있는 통일시장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있다. ‘장마당’이라 불리는 북한의 시장들은 90년대 중반 이후 자생적으로 생겨나 급속도로 그 숫자가 늘고 있다. AP/연합뉴스.
2004년 북한 평양에 있는 통일시장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있다. ‘장마당’이라 불리는 북한의 시장들은 90년대 중반 이후 자생적으로 생겨나 급속도로 그 숫자가 늘고 있다. AP/연합뉴스.

‘아래로부터의 시장화’는 이런 배경에서 시작됐다.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주민들은 국가가 허용하지 않았던 영역에서 식량과 소득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국가체제 밖에서 물품을 거래하고 교환하면서 원시적인 시장경제를 창출했다. 집에서 먹거나 시장에 내다팔기 위해 먹거리를 재배했고, 개인과 가구, 기업소 등에서 소규모 상품 생산 능력을 발전시켰다. 이른바 ‘장마당’(시장)의 본격적인 등장이다. 상품은 중국에서 통용되는 가격, 곧 국제가격으로 팔렸고, 미국 달러와 중국 인민폐 등 외화가 널리 사용됐다. 그 결과 2000년대 이후 돈만 있다면 북한 시장에서 다양한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무허가 노점상부터 평양의 통일시장 같은 대규모 시장까지 등장했다. 주로 여성들이 가족 생계를 위한 자력갱생 활동에 나섰는데, 1990년대 말 대략 70%의 여성이 경제활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북한 정권은 시장화를 이용했다. 정권 유지에 모든 목표를 맞춘 ‘선군정치’ 시대에 정권은 ‘위로부터 시장화’를 시행하는 데 반대했지만, “실제로는 ‘식량안보’를 포함한 핵심적인 우선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아래로부터’ 이미 진행된 사실상의 시장화에 의존했다.” 2002년 7월 시행한 경제개혁 입법(7·1경제관리개선조치)에는 가격과 임금 억지의 부분적 해소, 주택과 공공 설비 등 공공부문에 대한 보조금 삭감, 손실과 이익에 따른 기업 운영 등이 포함됐다. 2003년에는 ‘농산물 직거래 시장’을 ‘일반 시장’으로 재지정해 이전 10년 동안 이뤄진 시장 확장을 인정해줬다. 군과 정부가 직접 무역회사를 차려 이윤 추구에 나서기도 했다.

국가의 구실이 사라지고 시장화가 대두하면서, 벼락부자가 등장하고 체제 내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등 본질적인 변화가 시작됐다. 북한 주민은 “중앙집권화된 의사결정에 의한 지배권한을 대체로 수용하기보단, 정부 정책을 피해 가면서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적 의사결정 권한을 일상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일상적인 경제생활은 정치생활과 분리됐고, 정부에 대한 냉소주의 문화가 뿌리를 내리며 제도권력과 정치적 권위로서 당의 위상이 추락했다. 시장화 자체는 북한 정권에 큰 위협이었다.

이에 북한 정권은 대내적으로는 정치적 억압을 한층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 정권을 지키는 유일한 카드인 ‘핵무장’에 매달렸다. 정치적 억압뿐 아니라 “북한 주민 대다수의 우선순위가 굶주림에 따른 질병의 지속적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식량과 소득을 확보하는 데 있었”기에 민중봉기는 차단됐다. 그 결과 정권 유지라는 전술적 성공은 거뒀지만, 국가와 사회가 전체적으로 낙후하는 전략적 실패를 피할 수 없었다. 그동안 미국과 한국은 북한 정권 붕괴를 외부에서 압박하는 ‘전략적 인내’를 강행했는데, 그 결과 외교는 사라졌고 북한의 핵 능력은 되레 발전했다. 지은이는 이에 대해 “‘전략적 인내’가 ‘전략적 마비’가 되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연구학원(SOAS) 한국학센터 연구교수인 헤이즐 스미스는 25년 동안 자료 조사와 현지 조사를 바탕으로 북한이 여느 나라처럼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방식으로 분석 가능한 나라임을 보여준다. 창비 제공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연구학원(SOAS) 한국학센터 연구교수인 헤이즐 스미스는 25년 동안 자료 조사와 현지 조사를 바탕으로 북한이 여느 나라처럼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방식으로 분석 가능한 나라임을 보여준다. 창비 제공

지은이는 “북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허세’를 중단하고, 북한의 비핵화를 최우선순위로 포함해 포괄적인 해결책을 얻기 위한 일관된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괄적 전략을 위해선 정권에 대한 안보 보장 등 불편한 타협이 수반되겠지만, ‘아래로부터의 시장화’를 이뤄낸 북한 주민들이 ‘변화의 주역’이 될 것이란 기대를 걸어보자는 것이다. ‘악당과 희생자’와 같은 틀에 박힌 편견과 왜곡에서 벗어나는 게 그 출발점일 것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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