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트레버 소설 ‘루시 골트 이야기’
선의가 악의로 바뀌고 시간은 어긋나
‘작가들의 작가’다운 밀도높은 문장 일품
선의가 악의로 바뀌고 시간은 어긋나
‘작가들의 작가’다운 밀도높은 문장 일품
윌리엄 트레버 지음, 정영목 옮김/한겨레출판·1만4000원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 우리 몫이 아닌 걸 훔치고 있는 거야. 달링 레이프, 우리는 기억으로 만족해야 돼.” 아일랜드 작가 윌리엄 트레버(사진·1928~2016)의 소설 <루시 골트 이야기>에서 주인공 루시는 연인 레이프의 구혼을 이런 말로 물리친다. 사랑이 자신의 몫이 아니며, 그럼에도 사랑과 결혼을 한다면 그것은 남의 것을 훔치는 도둑질과 같다는 것, 따라서 지금의 짧은 사랑을 결혼으로 이어 가는 대신 두고두고 추억하며 음미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나는 우리 사랑의 기억이 전부인 삶을 살 거야.” 루시와 레이프의 사랑에는 무슨 문제가 있는가. 이야기는 소설의 시작이자 사랑에 관한 루시의 독특한 생각의 출발점인 십몇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일랜드 독립 투쟁이 한창이던 1921년, 잉글랜드 출신인 에버라드 골트 대위의 집에 불을 지르려 아일랜드 청년 셋이 침입하고 골트 대위가 쏜 총에 그중 한 청년인 호라한이 작은 부상을 입는다. 골트 대위가 청년의 집에 찾아가 용서를 구하지만 사과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골트 일가는 안전을 염려해 아일랜드를 떠나기로 한다. 그러나 집을 떠나기 싫었던 여덟살 루시는 이사를 앞두고 숲속에 몸을 숨기고, 바닷가에서 발견한 루시의 흔적을 근거로 외동딸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판단한 부모는 비탄 속에 이사를 강행한다. 숲속 은신처에서 사고로 부상을 입은 채 며칠 만에 발견된 루시는 하인 부부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지만, 결국 딸의 죽음을 초래했다고 믿은 아일랜드의 상황에 환멸을 느낀 부모는 일체의 연락을 끊은 채 해외를 떠돈다. 그러니까 레이프의 구혼을 거절하는 루시의 마음 밑자리에는 죄책감이 있다. 자신은 철부지 어린 시절 부모님께 고통과 슬픔을 안겨드렸고, 그에 대한 용서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행복을 좇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다. 기억이 전부인 삶을 살겠다면서도 “하지만 두 분이 지금 오시면 (…) 그러면 너하고 나는 기억으로 만족하지 않아도 될 텐데”라고 루시는 말하지 않겠는가.
ⓒ로드 스노든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