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소-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
마르크 오제 지음, 이상길·이윤영 옮김/아카넷·1만3000원
세계화와 도시화가 심화되면서, 우리의 삶의 축은 갈수록 집이라든지 학교, 교회, 동네 상점과 같은 ‘전통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이동과 소비, 커뮤니케이션만을 목적으로 삼는 공간으로 옮겨가고 있다. 하루 동안 자동차와 기차역, 고속도로, 주유소, 대형매장, 아웃렛, 텔레비전과 인터넷 등에 머무르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여기’의 이런 특성은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프랑스 출신의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82)는 이런 공간들을 ‘비장소’(non-place)라 부르고 인류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학자다. 아프리카 현지에서의 민족학 연구 등 ‘먼 곳의 인류학’에서 출발했던 그는 점차 ‘지금-여기’의 전지구적인 변화를 하나의 시야에 넣는 ‘가까운 곳의 인류학’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비장소’에 대한 사유는 이런 과정에서 나왔다. 그가 1992년 출간했던 주저 <비장소>가 이번에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여태껏 국내에 출간된 오제의 저작은 <망각의 형태>(2003)가 유일했다.
프랑스 출신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나 정체성, 역사성이 없는 장소들을 지칭하는 ‘비장소’란 개념을 제시했다. 사진 찰스 맬리슨, 출처 위키미디어
서구 학계에서 90년대 초는 ‘근대 이후’를 진단하는 담론들이 쏟아져나온 때였다. 오제는 근대 특유의 ‘과도함’ 때문에 이미 우리가 근대의 지평을 넘어서버렸다고 보고, ‘초근대성’(over-modernity)을 ‘지금-여기’를 제대로 뜯어보기 위한 개념으로 제시했다. 엄청난 사건과 정보의 누적으로 이를 일관된 방향으로 파악하기 힘들어졌고(시간의 과잉), 각종 교통수단과 미디어의 발달로 먼 곳과 가까운 곳이 무차별적으로 뒤섞였으며(공간의 과잉), 집단적 정체성이 약화하는 대신 개인성이 부각(준거의 개인화)된 것이 초근대성의 배경이다.
비장소는 이러한 초근대적 양상들이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곳이다. “초근대성은 비장소들을 생산해낸다.” 먼저 지은이는 장소-비장소의 개념이 인류학을 위한 도구적 개념임을 명확히 한다. 그는 인류학의 탐구 대상인 ‘인류학적 장소’에는 정체성, 관계, 역사 등 최소한 세 가지의 공통된 특성이 있다고 꼽는다. ‘전통적’인 공간들은 고유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그곳에 정착한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주선한다. 비장소는 이런 요소들이 빠져 있는 공간이다. “장소가 정체성과 관련되며 관계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서 규정될 수 있다면,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도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은 비장소로 규정될 것이다.” 장소와 비장소는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실제 공간이 아니다. 지은이는 “장소는 결코 완전히 지워지지 않으며, 비장소는 결코 전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비장소는, 이를테면 ‘여행자의 공간’이다. 고속도로와 공항, 대형마트와 테마파크 등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듯이, 그것은 통과하는 곳, 소비하는 곳, 서로를 소외시키는 곳이다. 비장소가 작동하는 방식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인류학적 장소가 유기적인 사회성을 창조하는 것처럼, 비장소는 고독한 계약성을 창조한다.” 비장소를 이용하는 이들은, 먼저 자신의 신원을 제시해 그 공간과의 계약 관계를 확인한 뒤 익명성을 획득한다. 또 비장소 안에서 이용자들의 행위는 텍스트, ‘오른쪽 줄에 서시오’, ‘금연’, ‘여기서부터 보졸레입니다’ 등의 지시적인 말들에 따르는 것으로 이뤄진다. 비장소에서 사람들은 서로 비슷비슷한 ‘평균적 인간’으로서 일시적인 정체성만을 부여받는다. 여기에 과거는 없고 오직 영원한 현재만이 존재한다. 역설적으로 비장소의 체험은 익명의 쾌감과 익숙한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이탈리아 투스카니 지역의 한 전철역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 오제의 ‘비장소’는 고속도로, 기차역, 공항, 대형마트, 더 나아가 텔레비전과 인터넷 등의 미디어 커뮤니케이션까지 포괄한다. 출처 게티이미지
장소와 비장소는 서로 얽혀서 서로에게 침투하는데, 이 초근대성의 공간은 나날이 커져가고 있다. 처음 이 책이 나왔을 때와 견줘볼 때 오늘날의 전지구화와 도시화는 그 심화된 정도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최근 지은이는 “오늘날 비장소는 모든 가능한 장소의 맥락이 되었다”고까지 말한다. 지은이는 이런 현상에 대해 쉽게 낙관도 비관도 표출하지 않으며, ‘지금-여기’의 현실적 조건을 직시하는 데 주력한다. 어쨌건 새로운 공간에 대한 사유는 비장소라는 당대의 주어진 조건 위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작업의 밑바탕에는 초근대성이 초래하는 다양한 불평등과 사회적 격차, 양극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장소는 유토피아의 정반대다. 그것은 (유토피아와 달리) 실제로 존재하고, (유토피아와 달리) 어떤 유기적 사회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지적 속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또 2008년 낸 2판 서문에서는 “우리의 이상은 경계 없는 세계여서는 안 되며, 모든 경계가 인정되고 존중되며 침투 가능한 세계여야 한다”고도 말한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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