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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숙녀가 되고 싶지 않았던 중세의 소녀

등록 2017-10-12 20:06수정 2017-10-12 20:59

[한미화의 어린이책 스테디셀러]

소녀, 발칙하다
카렌 쿠시먼 지음, 이정인 옮김/생각과느낌(2007)

“인생의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또하나의문화(또문)에서 펴낸 <새로 쓰는 사랑이야기>와 <새로 쓰는 결혼이야기>라고 답했던 적이 있다. 지방 소도시에서 태어나 ‘한 사람만 참으면 온 집안이 조용하다’고 여긴 엄마를 보고 자란 내게 또문의 무크지는 다른 생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1990년대를 풍미한 페미니즘은 짧았다. 사람들은 페미니즘의 ‘페’자만 들어도 속이 뒤틀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자유주의가 밀어닥쳐 고용이 불안해지자 페미니즘은 배부른 소리가 되었다. 2000년대 등장한 여성 자기계발서는 오히려 여성성을 최대의 무기로 삼으라고 주문했다.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이 땅의 지영씨들이 페미니즘의 공백기에 성장한 세대였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남녀평등이 일상이 되었다고 여겼지만 수많은 지영씨들이 엄마이자 아내가 되는 순간 ‘며늘아기’이자,맘충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영씨들이 자발적으로 페미니즘을 학습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어린이·청소년이 읽을 만한 여성주의 동화는 드물다. 이 중 캐런 쿠시먼의 <소녀, 발칙하다>는 페미니즘 계열의 작품으로 여성 해방의 길고 험한 역사를 짐작하도록 돕는 책이다. 십자군 전쟁이 끝나가는 1290년 영국 링컨셔 스톤브리지에 사는 열네 살 캐서린은 시골 기사의 딸이다. 호기심이 많고 적극적인 캐서린은 여자에게 강요된 숙녀의 예절이 부당하다고 느끼고 충돌한다.

예컨대 숙녀는 감정을 절대 밖으로 드러내면 안 되고, 바지 입기, 큰 소리로 웃기, 혼자 있기, 달리기, 결혼하고 싶은 사람과 결혼하기 등이 모두 금지되었다. 바느질에 힘쓰다 아버지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구혼자들이란 대개 결혼을 해서 신분을 높이거나, 지참금으로 한몫을 잡으려들 뿐이었다. 캐서린은 온 힘을 다해 구혼자들을 골탕 먹이고 결혼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렇다고 중세의 캐서린에게 지금과 같은 가치관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800여년 전 여성의 삶을 짐작해볼 수는 있다.

잘 알려져 있듯 오랫동안 결혼은 자원을 축적하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부유한 가문들은 자녀를 전략적으로 결혼시켜 부를 지키고 정치적인 동맹을 맺었다. 상류층의 결혼은 대규모의 경제적인 투자였다. ‘사랑을 위한 결혼’을 선택하고 남편이 생계를, 아내가 가사를 책임지는 새로운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은 300여년밖에 되지 않는다.

사랑과 결혼의 시스템이 완성된 지금, 인류는 다른 생각을 시작한 듯하다. 어쩌면 최근의 페미니즘 학습 붐은 이제껏 믿었던 성과 결혼과 가족의 가치에 대해 새로운 상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보인다. 어슐라 르귄이나 옥타비아 버틀러가 그린 에스에프(SF)가 현실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 초등 6학년부터.

한미화 출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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