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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17년차 편집자가 피운 시의 꽃

등록 2017-11-02 19:39수정 2017-11-02 20:13

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
박신규 지음/창비·8000원

박신규(사진)는 17년차 편집자다. 2001년 창비에 입사해 문학 분야 편집자로 일했고 지금은 편집자문위원 직함으로 창비의 시 애플리케이션 ‘시요일’ 개발과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한 그는 편집 일을 하는 틈틈이 시를 썼고,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금을 받았으며, 2010년 <문학동네>에 시를 발표하며 공식 등단했고, 마침내 첫 시집 <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를 펴냈다.

“음지에서 일한다/ 국정원의 사정이 아니다/ 책상이 빨갛게 물든다”(‘노동시 혹은 에디터십’ 부분)

시집에는 <만인보> 전30권을 마감하느라 밤늦게까지 야근을 계속하던 이야기도 들었는데, 편집자의 일이라는 ‘그늘진 말’에서 피어난 ‘꽃’이 바로 이 시집이라 해도 좋겠다. 물론 시집 제목을 지을 때 시인의 의도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의도는 아마도 이런 시들에 담겼을 것이다.

“그늘진 말들이 와서/ 가만히 안아주었네/ 빨리 늙고 싶은 마음들이 함께/ 차가운 맹지에 스며들었네/(…)/ 이미 전생에서 버림받은 말들로/ 사랑을 나누며 잠이 들었네/ 바람꽃 앞에 내던진 시간,/ 늘어진 속옷처럼 놓아버린 마음들이/ 꽃자리에 머물렀네”(‘삼십세’ 부분)

“꽃보다 그늘이 아름답지/ 한밤중일수록 그늘은 더 환하지//(…)// 배고파 우는 무정한 그늘/ 텅 빈 흰 그늘”(‘나무수국’ 부분)

“그늘진 말들”, “전생에서 버림받은 말들”을 보듬고 그 말들로 꽃을 피우려는 노자적 그늘의 세계관이 시집을 관류한다. 그런 시인이 상처와 죽음에 예민한 것은 당연한 노릇. 아니, 애초에 상처와 죽음이 그의 그늘의 시들을 낳았을 테다. “죽을 만큼 아팠다는 것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너는 봄이다’)이나 “죽을 것 같은 고통만 남고/ 죽지 않았을 때 바다로 갔다”(‘눈길을 따라가다’) 같은 구절들은 그가 감당해야 했던 상처와 고통의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

박신규 시인
박신규 시인

또한 두드러지는 것이 인물의 특징을 날카롭게 잡아내어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시들이다. “재수 없게 육지 뜨내기가 굴러들어왔다고/ 뭐라도 물어볼라치면 쏴붙이는 ‘무사?’”로 냉랭하게만 대하더니 밤새 가을 태풍이 무섭게 다녀간 이튿날 댓바람에 달려와서는 “어떵 안해신냐? 애기들 다치진 안했고?”(‘늙은 무사’)라며 안부를 묻던 제주 하도리 하르방의 반전은 인상적이다. 그런가 하면 말이 느리기로 호가 난 선배 시인을 두고 “다음 생이라는 게 있다면/(…)/ 우주에서 가장 느려터진 말투로/ 그의 복장을 터뜨리는 것”(‘김사인과 싸우다’)을 숙제로 꼽는 데에는 과연 그러하겠다고 무릎을 치며 탄복하게 된다.

최재봉 기자, 사진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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