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후기
보리스 그로이스 지음, 김수환 옮김/문학과지성사·1만3000원
여전히 공산주의를 말하는 좌파들에게마저, 흔히 ‘스탈린주의 시기’라 불리는 소비에트 공산주의는 나치즘과 별 차이가 없는 전체주의의 역사였거나, 너그럽게 봐준대도 공산주의를 오독한 실패와 오류의 역사였다. 만약 누군가 “소비에트야말로 진정한 공산주의였다”고 주장한다면 어떨까?
최근 번역 출간된 보리스 그로이스(70) 미국 뉴욕대 석좌교수의 <코뮤니스트 후기>(2010)는 이런 도발적인 주장을 담고 있는 책이다. 동독 출신으로 소련에서 공부한 바 있는 지은이는 이 책에서 기존의 온갖 통념들을 훌쩍 뛰어넘는 ‘사고실험’을 편다.
“공산주의는 정치가 자유롭고 자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경제를 정치에 종속시키려는 기획”이라는 첫 대목은 평범하다. 그러나 “공산주의 혁명은 돈의 매개로부터 언어의 매개로 사회를 번역하는 것”이라는 서술이 등장하고,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언어의 왕국’, ‘철학에 근거해 통치되는 국가’로 보는 풀이가 뒤따른다.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돈으로 매개하는 사회라면, 공산주의는 모든 것을 언어로 매개하는 사회라는 것. 때문에 “매개의 차원에서 보면 자본주의와 그에 대한 담론적 비판은 이종적이며 서로 만나지지 않는다. 의미 있는 비판의 대상이 되려면 우선 사회가 바뀌어야만, 즉 언어화되어야만 한다.”
철학자이자 예술비평가인 보리스 그로이스 미국 뉴욕대 석좌교수.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소비에트 공산주의는 바로 이것, 곧 ‘사회의 총체적인 언어화’를 이룬 체제였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그것이 약속하는 것은 자기모순 속에 놓인 삶, 최대치의 내적 분열과 긴장”의 연속이다. 언어를 매개로 한 대립, 곧 ‘역설’을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치환하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자본주의와 달리, 소비에트에서는 “영구히 타오르는 불꽃”처럼 변증법적 유물론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소비에트를 단순히 ‘일탈과 실패’ 정도로 파악한 서구 좌파들은 이런 지점을 간과했다고 비판한다.
더 나아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공산당 지도부가 스스로의 자유 의지에 따라 공산주의를 철폐한 결과”라고까지 주장한다. 지은이는 ‘메타노이아’(개인이 사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으로부터 보편적인 관점으로 이행하는 것)라는 개념을 들어, 공산주의가 총체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의 일환으로 스스로의 해체를 결행했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공산주의의 다음 실현 단계가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폐지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가 이를 예비했다고까지 말한다.
때론 농담 같고 때론 궤변 같은 지은이의 사고실험은, 무엇보다 ‘지금 여기’에서 금지된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여는 데에 그 목표를 두고 있는 듯 보인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이른바 좌파들이 “비판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혁명적 주체”는 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도발 같기도 하다. “자본주의 경제라는 조건 아래 살아가는 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벙어리 상태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운명이 그에게 말을 걸지 않기 때문이다.”
최원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