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 지음/도서출판b·9000원 언론인 고명섭(사진)은 <니체 극장> <담론의 발견> 같은 인문서와 함께 시집과 청소년 교양 소설도 낸 전방위 필자다. 첫 시집 <황혼녘 햇살에 빛나는 구렁이알을 삼키다>(2000)는 청춘의 절망과 고통을 비의적 이미지에 녹여내 강렬한 인상을 준 바 있다. 일련번호를 붙인 연작시 50편을 묶은 두번째 시집 <숲의 상형문자>의 세계는 첫 시집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낡은 보들레르 시집 한 권과/ 어디서 왔는지 가물가물한 릴케의 수기/(…)/ 키예프 정교회 수도원 쌓인 해골들 사이에서/ 시간의 악력에 부서지지 않는/ 기억의 건축술을 익힌다”(‘1-기억의 건축술’ 부분) 첫 작품에서 언급된 보들레르와 릴케는 시인의 지적 여정의 출발을 알리는 셈이다. 발자크, 도스토옙스키, 카프카 같은 문인들과 갈릴레이, 니체,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학자들, 로베스피에르와 스탈린, 히틀러 등 정치인까지 그의 지적 여정에 동반자가 되어 준 이들이 시집 안에서 차례로 명멸한다. 시인은 해당 인물들의 삶의 한 장면 또는 성격적 특징을 날카롭게 잡아내어 시로 빚어 놓는다. 시로 쓴 평전이라 할 법하다. “돌은 돌을 닮은 숫자가 되고/ 나무는 나무를 닮은 기호가 됐다/ 비는 문법을 타고 내려오고/ 물은 공식을 타고 강으로 갔다/ 수증기는 법칙을 타고 올라가고/ 별은 보이지 않는 궤도 위에서 돌았다/ 늙은 남자는 수학의 가슴에 머리를 박고 귀를 꼭 막고/ 우주가 합주하는 음악을 들었다”(‘8-갈릴레오, 코기토’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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