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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평전 형식 시로 쓴 정신사

등록 2017-11-23 19:50수정 2017-11-23 20:29

숲의 상형문자
고명섭 지음/도서출판b·9000원

언론인 고명섭(사진)은 <니체 극장> <담론의 발견> 같은 인문서와 함께 시집과 청소년 교양 소설도 낸 전방위 필자다. 첫 시집 <황혼녘 햇살에 빛나는 구렁이알을 삼키다>(2000)는 청춘의 절망과 고통을 비의적 이미지에 녹여내 강렬한 인상을 준 바 있다. 일련번호를 붙인 연작시 50편을 묶은 두번째 시집 <숲의 상형문자>의 세계는 첫 시집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낡은 보들레르 시집 한 권과/ 어디서 왔는지 가물가물한 릴케의 수기/(…)/ 키예프 정교회 수도원 쌓인 해골들 사이에서/ 시간의 악력에 부서지지 않는/ 기억의 건축술을 익힌다”(‘1-기억의 건축술’ 부분)

첫 작품에서 언급된 보들레르와 릴케는 시인의 지적 여정의 출발을 알리는 셈이다. 발자크, 도스토옙스키, 카프카 같은 문인들과 갈릴레이, 니체,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학자들, 로베스피에르와 스탈린, 히틀러 등 정치인까지 그의 지적 여정에 동반자가 되어 준 이들이 시집 안에서 차례로 명멸한다. 시인은 해당 인물들의 삶의 한 장면 또는 성격적 특징을 날카롭게 잡아내어 시로 빚어 놓는다. 시로 쓴 평전이라 할 법하다.

“돌은 돌을 닮은 숫자가 되고/ 나무는 나무를 닮은 기호가 됐다/ 비는 문법을 타고 내려오고/ 물은 공식을 타고 강으로 갔다/ 수증기는 법칙을 타고 올라가고/ 별은 보이지 않는 궤도 위에서 돌았다/ 늙은 남자는 수학의 가슴에 머리를 박고 귀를 꼭 막고/ 우주가 합주하는 음악을 들었다”(‘8-갈릴레오, 코기토’ 부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우주 만물이 수학의 법칙으로 해석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의 희열을 그린 이 작품에서 시인은 갈릴레이가 맛본 지적 발견의 희열을 거의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달콤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아쉬움으로/ 선장의 가슴에선 휑한 바람이 불었다/(…)/ 진실을 알아냈다는 어두운 쾌감이/ 쓰라린 마음의 벼랑을 타고 올라왔다”(‘12-세이렌, 스핑크스’ 부분)

오디세우스와 오이디푸스를 다룬 이 시에서 오디세우스의 역경 극복과 오이디푸스의 몰락이라는 표층 안쪽에서 그 역설적·반어적 의미를 읽어 내는 시인의 눈썰미는 명민하다. 이런 만만치 않은 안목이 책으로 대표되는 ‘숲의 상형문자’를 찾느라 고난과 상처를 마다하지 않았던 시인의 치열한 지적 탐구의 결과임을 아래 시는 알게 한다.

“책 속으로 들어가 책과 책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면/ 멋대로 난 풀잎의 혓바닥이 종아리를 스치고/ 사금파리들이 발가락에서 피를 핥았다/ 손전등을 들고 더듬어보는 숲의 상형문자/ 입 꼭 다문 문자들이 눈을 깜빡거렸다”(‘3-상형문자’ 부분)

최재봉 기자, 사진 도서출판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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