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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사회적 죽음 겪었지만 예술적으로는 더 탄탄해졌어요”

등록 2017-11-27 15:37수정 2017-11-27 21:11

장편소설 ‘유리’ 내놓은 작가 박범신
논란 거치며 1년여 ‘지각출간’
“젠더 감수성 편차 성찰, 문학에 매진”
박범신 작가가 27일 오전 서울 서교동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소설 <유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박범신 작가가 27일 오전 서울 서교동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소설 <유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지난 1년은 정말이지 고통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작가로서 저는 두번 죽었어요. 한번은 90년대 초의 절필이었고 이번이 두번째 죽음인 셈이었죠. 이 일을 겪으면서 사회적 자아로서 박범신은 고통받은 게 사실이지만, 예술적 자아로서의 나는 더 강력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로서 제가 좀 느슨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거꾸로 깨닫는 계기가 되었어요.”

신작 장편 <유리>(은행나무) 출간에 즈음해 오랜만에 만난 박범신은 다소 초췌한 모습이었다. 실핏줄이 터져 충혈된 눈으로 나타난 그는 “책 출간과 언론 인터뷰를 앞두고 많이 긴장한 것 같다. 아무리 마음을 다독여도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떨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27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교동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작가를 만났다.

<유리>는 예정대로라면 지난해 10월에 나올 참이었다. 지난해 3월부터 한국의 모바일플랫폼과 대만 문학잡지에 동시 연재했고 역시 두 나라에서 동시 출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책 출간을 앞두고 불미스러운 일이 터졌다. 작가의 부적절한 성적 농담과 신체 접촉을 고발한 글이 에스엔에스에 올라온 것. 당시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슈가 되었던 문단 성폭력 사태와 맞물려 여론이 나빠졌고, <유리> 출간은 무기한 연기됐다.

“젠더 감수성에 대한 편차가 오해를 불렀던 것 같아요. 마음이 아픕니다. 팩트 자체를 가지고 다투고 싶지는 않았어요. 다투는 것 자체가 치욕스럽기도 했고요. 처음 고발 글이 올라왔을 때 제가 사과의 뜻을 에스엔에스에 올린 것은 40년 넘게 제 소설과 함께해 온 독자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럽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 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저로 인해 마음을 다쳤다면 그에 대해 미안하다는 뜻이었습니다.

박범신 작가가 27일 오전 서울 서교동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소설 <유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박범신 작가가 27일 오전 서울 서교동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소설 <유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1년여 지각 출간된 <유리>는 20세기 초 유랑의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주인공 ‘유리’(流離)가 한반도와 중국, 대만 등 동아시아를 떠돌면서 겪는 일들을 통해 인간과 역사의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맨발에 관한 전설’이라는 부제대로 유리는 모든 제도와 억압에서 자유롭기를 꿈꾸지만, 그가 살았던 ‘짐승의 시대’는 그런 유리의 자유혼을 온전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식민 수탈에 협조하면서 부와 명예를 쌓은 큰아버지를 암살한 것을 필두로, 중국 대륙에서 항일 독립 투쟁에 가담하고,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과 한반도 남과 북 사이의 전쟁과 살육에 휘말려드는 데에서 보듯 자유를 향한 유리의 꿈은 역사와 민족이라는 커다란 맥락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한다. 유리의 첫사랑 소녀 ‘붉은댕기’, 그리고 마지막 여인이었던 점순이가 둘 다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 고통 받는 이들로 설정된 데에서도 역사의 하중은 무겁게 느껴진다. 소설 후반부에서 유리가 떨칠 수 없는 역사의 무게를 뒤늦게 깨닫는 대목은 이러하다.

“죄는 죄대로, 오욕은 오욕대로, 정한은 정한대로, 꿈은 꿈대로 한통속이 되어 엮이는 흐름이 역사라 할진대, 그것을 거부하고 얻는 자유가 과연 어디 있겠는가.”

소설은 100살 나이가 되어 죽음을 앞둔 유리가 ‘손녀’에게 자신의 지난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한다.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삼지만, 나라 이름을 수로국(조선·한국), 화인국(일본), 대지국(중국), 풍류국(대만) 식으로 변형함으로써 우화적 상상력의 여지를 열어 놓았다. 구렁이와 은여우, 원숭이, 햄스터 같은 동물들이 유리와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위급한 순간에 그를 구하는 식의 판타지 요소도 곁들였다. 작가는 “젊은 독자들이 즐겨 찾는 모바일에 연재를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역사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며 “이 소설을 쓰면서 이야기하는 방식이 확장된 느낌이 든다.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라도 ‘나의 문장’으로 잘 놀아 볼 것 같다”고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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