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
장수연 지음/어크로스·1만3000원
모성이 신화라는 것은 여러 사람들을 통해 숱하게 설파되어 왔지만 모성신화는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엄마들을 붙잡는다.
한 예로 일하는 엄마들에게 흔히 벌어지는 밤풍경을 들여다보자. 일을 마치고 아이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으로 헐레벌떡 집에 들어와 먹이고 씻기고 놀아준다. ‘그래도 오늘은 엄마 역할을 제대로 했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아이를 재우려고 하는데 아이는 엄마와 더 놀고 싶어 버틴다. 아이를 재운 뒤 해야 할 집안일, 미처 끝내지 못하고 싸 들고 온 회사일, 다음날 아침의 부산한 준비를 떠올리며 초조해지는 마음으로 아이를 달래보다가 “왜 이렇게 엄마를 힘들게 해?” 기어이 화를 내고야 만다. 눈물바람으로 잠이 든 아이를 들여다보면서 ‘내가 엄마 자격이 있나’ 자책감에 우울한 하루를 마감한다.
자격증이란 건 애당초 없는데도 ‘엄마 자격’에 자신없어하고 ‘나쁜 엄마’라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엄마들에게 책은 친구처럼 말을 건넨다. “우리 모두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잖아.”
지은이는 두 딸의 엄마이자, 방송사 라디오 피디, 아내이면서 며느리로 살아가는 서른다섯살 워킹맘이다. 피디라는 바쁜 일을 하면서 아이를 둘이나 키워내는 엄마라니, 스펙만 보면 이 또한 엄마들의 ‘열폭’을 자극하지만 책을 펼치면 이어지는 너무나 정직한 고백들은 “힘내”라거나 “잘할 수 있어”라는 말 한마디 없이도 좌절과 기쁨, 분노와 희망을 널뛰는 ‘육아 사춘기’ 엄마를 위로한다.
일하는 엄마인 지은이 장수연 피디는 아이를 키우며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될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어크로스 제공
첫 장에서 “지울 거야, 우리가 어떻게 키워” 첫 임신을 확인하자마자 남편에게 선언하듯 했던 말부터 모성신화의 금기를 깬다. 임신을 축복이 아닌 재앙으로 받아들이다니 낙태 합법화 반대론자들이 들으면 경악할 노릇이지만 지은이는 왜 모든 임신이 축복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우여곡절 끝에 첫째를 낳고 둘째까지 가졌을 때 지은이는 커피숍 화장실에서 누군가 사용하고 버린 임신테스트기를 우연히 본다. “집이 아닌 카페 화장실에서, 그것도 시내 한복판에 있는 사람 많은 커피숍에서 임신 테스트를 해보는 여자의 심정,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아이를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이를 지울까’ 고민하던 워커홀릭(일중독) 여성이 둘째를 가지고 일을 잠시 접을 정도로 변하는 데 걸린 4년여 시간의 기록이다.
일하는 엄마인 지은이 장수연 피디는 책에서 아이를 키우며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될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어크로스 제공
물론 그 4년이 냉정한 워커홀릭이 모성애의 현신으로 변모한 시간은 아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직면해야 하는 건 단순히 어린이집이나 학원 고민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이다. 어떻게 키울까,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거쳐 지은이가 도달하는 곳은 ‘나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육아휴직 중에 무례한 전화를 받고서 며칠 동안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던 지은이는 자신의 분노가 약자, 즉 “내가 화내도 되는 대상”에 대한 노여움이었음을 깨닫는다. 약자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고서는 부모에게 철저한 약자인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하기 힘들다는 깨달음. “아이를 낳아 기르는 건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될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이라는 지은이의 결론은 이 책이 육아서의 범주를 넘어서게 만드는 지점이다.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의 지은이 장수연 피디. 어크로스 제공
같은 맥락에서 아빠들이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딸을 둔 아버지이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에 대해서 무지하다면, 여성에게 가해지는 위협과 차별이 얼마나 일상적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왜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남성의 폭력이나 성폭력에 희생되고 있는지, 대체 왜 이런 범죄가 이렇게도 많은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남성과 여성의 권력 격차에 대해 직시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지 않는다면 딸의 행복한 인생을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겠지만 그걸 이루는 방법은 놓치는 거라고 생각한다.”
모성신화의 유령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아이와, 그리고 육아의 동반자와 함께 성장해 나가기. “숨고 싶고 도망가고 싶지만 오늘도 컴퓨터 앞에서 스스로를 독려하며, (…)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일하는 엄마가 이 사회에서 겪게 되는 일은 무엇인지, 나는 무엇이 불편하고 우리 공동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길 원하는지”에 대하여 지은이는 오늘도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말을 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