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넘어 -급진민주주의자의 정치경제사회 혁신 프로그램
로베르토 웅거 지음, 이재승 옮김/앨피·2만3000원
정치에서 상상력이 사라진 지 오래다. 보수파는 주어진 환경과 제도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니 그저 받아들이라고 한다. 여기에 맞서는 진보파의 목소리는 재분배와 개인의 권리를 요구하는 데 머물고, 체제를 갈아엎자는 혁명파의 주장에는 짙은 공허함이 배어나온다. 정치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야 할 이데올로기들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혔고, 전문가와 지식인들은 단기적이고 기술적인 대안들로만 시야를 좁히고 있다.
브라질 출신의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인 로베르토 웅거(70)는 이런 현실 속에서 더욱 ‘큰 그림’을 제시함으로써 사회개혁에 상상력을 불어넣고자 하는 학자다. 1970년대 미국 ‘비판법학’ 운동의 창시자로 꼽히는 그는 브라질 현실 정치에도 직접 간여하는 등 이론과 현실을 넘나들며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갈고닦아왔다. 최근 이재승 건국대 로스쿨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된 <민주주의를 넘어>는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던 1998년에 출간된 책이다. 20년 전 책이지만, 옮긴이는 “현재 신자유주의는 끝났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정치 세력들은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명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곤경을 헤쳐 나갈 비전을 줄 것이라고 판단했다”며 번역에 나선 이유를 밝힌다.
브라질 출신의 사회과학자 로베르토 웅거.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신자유주의와 보수화된 사민주의 사이의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는 점에서, 지금의 상황은 2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웅거는 이 양자택일을 거부하고, ‘민주주의의 심화’와 ‘개인의 역량 강화’를 바탕으로 삼는 새로운 정치적 기획을 제안한다. 정치·경제·사회 모두를 아우르는 그의 통합적 비전은 “민주주의는 운명을 거부하는 힘이다”, “정치는 우연성과 필연성에 대한 대안이다” 등 마치 잠언이나 예언 같은 독특한 말들과 함께 번득인다. 기존 이데올로기에 갇히지 않고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거시적·미시적 차원을 포괄하는 실천적 ‘프로그램’을 다룬다는 것이 웅거 사유의 특징이다.
웅거는 자신의 작업이 “민주적 실험주의”를 지향한다고 밝힌다. 뿌리 깊게 고착되어 아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제도와 맥락을 그 속에 매여 있는 인간이 스스로 바꿔나갈 수 있느냐가 그의 최대 관심사다. 때문에 주어진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보수파뿐 아니라, “재분배적인 조세-이전” 방식 말고는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진보파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정치철학자들의 사변은 대체로 전후 산업민주주의 국가에서 시행된 재분배적인 조세-이전과 개인 권리 보호의 특징적인 관행들에 대한 철학적 주석에 불과했다.” 또 전통적인 혁명가들이 제도의 힘을 무시하고 체제를 완전히 전복하는 ‘혁명적 변화’를 주창하는 것을 비판하며, ‘프로그램’에 입각한 자신의 사회변혁이론은 ‘혁명적 개혁’이라고 말한다.
신자유주의와 이것을 거드는 손이 되어버린 사민주의의 작동 원리와 한계에 대한 지적도 날카롭지만, 무엇보다 생산과 성장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이를 ‘실천적 진보’ 전략의 핵심에 두려는 태도가 돋보인다. “대안은 보상적 프로그램이 아니라 생산주의적 프로그램이어야 한다”, “허약해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주요 국민경제들이 각기 ‘전위’ 부문과 ‘후위’ 부문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냉철한 현실 인식과, 생산에서의 이 위계적 구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숙제라는 것이다. 북대서양 양안의 민주국가들과 개발도상국, 특히 주변부 거대 국가들을 비교하는 데 힘을 쏟거나, ‘저축과 투자’로 대변되는 금융과 산업 사이의 관계나 기업 혁신의 원리 등에 논의를 집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브라질 출신의 사회과학자 로베르토 웅거.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런 고민을 바탕으로 그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 자신만의 진보적 대안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경제적으로는 정부와 기업 간의 분권적인 협력 관계의 제도적 형식을 발전시키고,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된 ‘경성국가’의 이념에 제도적 내용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개인의 역량에 투자하는 것” 등은 ‘전기 프로그램’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기존의 제도와 비교적 가까운 형태로 제도의 변형을 제시해 변화를 꾀하며, 기업 집단과 연계된 분권적인 정부 기구가 이를 담당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후기 프로그램’은 ‘전기 프로그램’에서 구축해야 할, 좌파 및 중도파 제 정당과 세력의 결집을 통해 수립된 포용적 민중연합을 기본적인 행위 주체로 삼는다. 이 단계에서는 사회 각 분야의 분권화가 확산되고 재산권에 대한 법체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등 좀더 근본적인 변화가 추진될 것이다.
다만 웅거는 구체적인 대안의 경로를 ‘청사진’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프로그램이 “청사진이 아니라 ‘흐름’이며, 건축이 아니라 음악”(<주체의 각성>)이라 강조하는데,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제도를 언제든 바꿔낼 수 있다’는 이런 태도는 ‘영구적 제도혁신’이라는 그의 또다른 테마와도 연결된다. 현실을 냉정하게 해부하면서도 ‘실천적 진보’와 ‘개인적 해방’을 연결시킬 수 있다고 믿는 그의 태도는, ‘완결된 목록’이나 ‘불가분성’, ‘결정론’에 얽매이는 여타 다른 사회개혁이론과 그의 사유를 구분짓는 결정적인 요소다.
20년 전 그의 ‘예언’ 가운데 일부는 오늘날 상황에서 되새겨보게 하는 힘을 담고 있다. “신자유주의 교리의 옹호자들은 배제된 이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경제발전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 현대적 경제 부문에 통합될 때까지 기다려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배제된 이들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정치를 통해, 특히 대중영합적인 지도자를 선출하여 역풍을 일으키고, 경제적 대중영합주의와 경제적 정통설 사이에서 파괴적인 진자 운동을 다시 시작할 우려가 크다.” “전세계를 상대로 승리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패권국 미국의 일반 노동자들조차 십중팔구 자신들을 성난 국외자 정도로 느낄 것이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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