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재일동포 2세 작가 후카자와 우시오
‘까다로운 성질 탓에 다가가기 힘들었던 아버지의 장례식에 낯 모르는 여자와 노인이 찾아온다. 그들의 존재를 의아하게 여긴 딸 리아는 아버지에게 다른 인생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의 지난 세월을 되짚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름도 나이도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점차 밝혀지는 아버지의 과거는 매우 장렬하고도 절실한 것이었다. 1947년 2차 대전과 해방 이후 혼란기에 일본으로 건너와 몸이 가루가 되도록 일해 김대중씨를 지원하며,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힘썼던 것이다. 리아는 고향땅에 잠들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경상남도로 향할 결심을 한다.’
최근 5년 새 문단의 신예로 떠오르며 일본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는 재일동포 작가 후카자와 우시오(51·사진)가 새해 봄 발표할 신작 소설 <바다를 안고 달에 잠들다>(분게이혣주·문예춘추)의 얼개다.
지난달 중순 한국국제교류재단 초청으로 서울을 다녀간 그는 이 작품의 소재가 자신의 가족사라고 밝혀 새삼 눈길을 끌었다.
이혼뒤 두 아이 키우며 글쓰기 ‘힐링’
신인문학상 공모 대상 뽑혀 ‘작가’로 밀항·민주화운동 부친 ‘과거사’ 알고
뒤늦게 ‘한국인 정체성 찾기’ 작품으로
한·일역사 관심…‘이방자 이야기’ 연재
“새해 한글판 나와 고국 독자 만나고파” 실제로 1931년생인 작가의 부친 이아무개씨는 경남 사천(삼천포) 출신으로 고교생이던 48년 미군 지배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어떤’ 활동을 했다가 밀항을 했다. “배가 대마도 근처에서 침몰하는 바람에 헤엄을 쳐서 구사일생 상륙한 뒤 후쿠오카로 오셨대요.” 부친은 55년 조총련 결성 이전인 조련 산하 도쿄의 민족학교에서 수학 교사로 일했고, 60년 4·19혁명 이후 새 민단 대표 선출 날 5·16쿠데타가 터져 무산되자 민단을 탈퇴한 뒤 70년대 한청과 김대중의 한민통 등에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했다. “제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저보다 세살 위인 언니의 심장병 치료비를 벌어야 해서 운동을 중단하고 사업에만 전념하셨대요. 어머니는 재일동포 2세지만 일상적으로 일본말만 쓰셨기 때문에 자라면서 한국인이란 생각을 못했어요.” ‘도모미의 집에는 아버지의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었다. 어린 도모미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안아 주던 흐릿한 기억 속의 아버지에게서는 담배 냄새가 났고, 턱에는 큰 점이 있었다. 어렸을 때 생이별한 아버지를 생각하면, 온몸이 휘청거리는 듯한 불안하고 초조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가인 엄마 사야코가 중의원 의원 선거에 입후보하면서, 주간지의 보도를 통해 운동권 인사로 이상적인 세계의 실현에 힘썼던 멋진 아버지가 재일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알게 된다. 이 사실에 충격을 받은 도모미는 자신의 정체성과 마주하기 위해 아버지의 발자취를 좇게 되고, 일본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만남에 숨겨져 있던 드라마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앞서 2015년 펴낸 <소중한 아버지에게>(아사히신문출판)에도 그의 남다른 가족사가 녹아 있다.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는 “재일조선인이라는 ‘사랑할 수 없는 자신’과 마주한 여성을 그린 혼신의 작품”이라고 절찬하기도 했다. “딸만 넷을 키운 아버지는 엄격한 편이어서 결혼할 때까지 연애 금지였어요. 조치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뒤 외국계 금융기관에서 일하다 27살에 역시 재일동포 집안의 의사 남편과 중매결혼을 했어요. 시아버지가 말기암 투병 중이어서 선본 지 석달 만에 서둘러 식을 올린 탓에 서로 잘 알지 못했지요.” 결국 10여년 만인 2004년 이혼하고 홀로 두 아이를 키우게 된 그는 마음의 갈등과 양육의 어려움 등에 대한 고민을 블로그에 쓰기 시작했다. “내 얘기를 픽션으로 쓰면서 정리도 되고 위로를 받았는데 뜻밖에 댓글 반응이 좋았어요. 문장교실에 다니면서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배웠지요.” 2012년 주변의 권유로 응모한 출판사의 신인문학상 공모에서 그는 대상을 받으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R-18 문학상’(신초샤)의 당선작은 재일동포 사회의 중매쟁이 이야기를 쓴 단편 ‘카나에 아줌마’, 역시나 자신의 경험을 살린 것이다. 이 당선작을 포함한 5편의 단편을 묶어 이듬해 발표한 첫 작품 <한사랑―사랑하는 사람들>(신초샤)이 문단 안팎의 호평을 받으면서 그는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도쿄의 코리안타운 신오쿠보에서 일하는 뉴커머(80년대 이후 이주자) 점술가, 재일한국인과 결혼 뒤 제사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일본인 아내, 돌잔치 준비로 허둥대는 젊은 부부, 펜싱으로 올림픽 출전을 노리는 고등학생,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에게 휘둘리는 중학생 등이 등장해요. 모두가 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죠.” 그가 작가가 된 것은 이처럼 재일한국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두 아이의 진학과 진로를 고민하면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가족사를 직접 확인했어요. 아이들 취업과 결혼 등을 위해 일본 국적으로 귀화를 시켰지만 뿌리는 알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그는 지난해 한국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예전에는 재일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불행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이제는 두 나라의 문화를 다 아는 존재로서 (정서적으로) 풍요롭게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5년 낸 일본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를 소재로 한 <여기가 아니다>(지쓰교노니혼샤)도 그런 바탕에서 쓴 작품이다. “소리내서 주장할 수 없는 재일한국인의 삶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실제로 그는 앞으로 한·일 두 나라를 잇는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에 집중할 생각이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과 결혼한 황태자비 이방자의 한국 내 발자취를 소재로 한 작품을 새해부터 아사히신문출판의 문예지 <소설 트리퍼>에 연재해요.” 그의 새해 바람은 한글판이 나와 작품을 통해 한국 독자들과도 긴밀하게 소통하는 것이다. 글·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신인문학상 공모 대상 뽑혀 ‘작가’로 밀항·민주화운동 부친 ‘과거사’ 알고
뒤늦게 ‘한국인 정체성 찾기’ 작품으로
한·일역사 관심…‘이방자 이야기’ 연재
“새해 한글판 나와 고국 독자 만나고파” 실제로 1931년생인 작가의 부친 이아무개씨는 경남 사천(삼천포) 출신으로 고교생이던 48년 미군 지배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어떤’ 활동을 했다가 밀항을 했다. “배가 대마도 근처에서 침몰하는 바람에 헤엄을 쳐서 구사일생 상륙한 뒤 후쿠오카로 오셨대요.” 부친은 55년 조총련 결성 이전인 조련 산하 도쿄의 민족학교에서 수학 교사로 일했고, 60년 4·19혁명 이후 새 민단 대표 선출 날 5·16쿠데타가 터져 무산되자 민단을 탈퇴한 뒤 70년대 한청과 김대중의 한민통 등에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했다. “제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저보다 세살 위인 언니의 심장병 치료비를 벌어야 해서 운동을 중단하고 사업에만 전념하셨대요. 어머니는 재일동포 2세지만 일상적으로 일본말만 쓰셨기 때문에 자라면서 한국인이란 생각을 못했어요.” ‘도모미의 집에는 아버지의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었다. 어린 도모미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안아 주던 흐릿한 기억 속의 아버지에게서는 담배 냄새가 났고, 턱에는 큰 점이 있었다. 어렸을 때 생이별한 아버지를 생각하면, 온몸이 휘청거리는 듯한 불안하고 초조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가인 엄마 사야코가 중의원 의원 선거에 입후보하면서, 주간지의 보도를 통해 운동권 인사로 이상적인 세계의 실현에 힘썼던 멋진 아버지가 재일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알게 된다. 이 사실에 충격을 받은 도모미는 자신의 정체성과 마주하기 위해 아버지의 발자취를 좇게 되고, 일본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만남에 숨겨져 있던 드라마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앞서 2015년 펴낸 <소중한 아버지에게>(아사히신문출판)에도 그의 남다른 가족사가 녹아 있다.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는 “재일조선인이라는 ‘사랑할 수 없는 자신’과 마주한 여성을 그린 혼신의 작품”이라고 절찬하기도 했다. “딸만 넷을 키운 아버지는 엄격한 편이어서 결혼할 때까지 연애 금지였어요. 조치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뒤 외국계 금융기관에서 일하다 27살에 역시 재일동포 집안의 의사 남편과 중매결혼을 했어요. 시아버지가 말기암 투병 중이어서 선본 지 석달 만에 서둘러 식을 올린 탓에 서로 잘 알지 못했지요.” 결국 10여년 만인 2004년 이혼하고 홀로 두 아이를 키우게 된 그는 마음의 갈등과 양육의 어려움 등에 대한 고민을 블로그에 쓰기 시작했다. “내 얘기를 픽션으로 쓰면서 정리도 되고 위로를 받았는데 뜻밖에 댓글 반응이 좋았어요. 문장교실에 다니면서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배웠지요.” 2012년 주변의 권유로 응모한 출판사의 신인문학상 공모에서 그는 대상을 받으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R-18 문학상’(신초샤)의 당선작은 재일동포 사회의 중매쟁이 이야기를 쓴 단편 ‘카나에 아줌마’, 역시나 자신의 경험을 살린 것이다. 이 당선작을 포함한 5편의 단편을 묶어 이듬해 발표한 첫 작품 <한사랑―사랑하는 사람들>(신초샤)이 문단 안팎의 호평을 받으면서 그는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도쿄의 코리안타운 신오쿠보에서 일하는 뉴커머(80년대 이후 이주자) 점술가, 재일한국인과 결혼 뒤 제사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일본인 아내, 돌잔치 준비로 허둥대는 젊은 부부, 펜싱으로 올림픽 출전을 노리는 고등학생,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에게 휘둘리는 중학생 등이 등장해요. 모두가 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죠.” 그가 작가가 된 것은 이처럼 재일한국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두 아이의 진학과 진로를 고민하면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가족사를 직접 확인했어요. 아이들 취업과 결혼 등을 위해 일본 국적으로 귀화를 시켰지만 뿌리는 알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그는 지난해 한국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예전에는 재일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불행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이제는 두 나라의 문화를 다 아는 존재로서 (정서적으로) 풍요롭게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5년 낸 일본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를 소재로 한 <여기가 아니다>(지쓰교노니혼샤)도 그런 바탕에서 쓴 작품이다. “소리내서 주장할 수 없는 재일한국인의 삶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실제로 그는 앞으로 한·일 두 나라를 잇는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에 집중할 생각이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과 결혼한 황태자비 이방자의 한국 내 발자취를 소재로 한 작품을 새해부터 아사히신문출판의 문예지 <소설 트리퍼>에 연재해요.” 그의 새해 바람은 한글판이 나와 작품을 통해 한국 독자들과도 긴밀하게 소통하는 것이다. 글·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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