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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관통하는 슬프고 뜨거운 역사

등록 2017-12-28 19:18수정 2017-12-28 19:27

시베리아 시간여행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베를린까지 횡단 열차에 탄 사람들
박흥수 지음/후마니타스·1만8000원

작가 윤후명이 ‘하얀 그리움’이라고 표현했던 자작나무 숲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언젠가 타보겠다는 ‘꿈의 철마’다. 현직 철도기관사 박흥수가 쓴 <시베리아 시간여행>은 이 꿈을 반드시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활활 부추긴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일 베를린까지 가는 19일간의 여정이 철도에 대한 지식과 역사에 대한 감수성, 여행자 특유의 위트와 유머로 버무려져 있기 때문이다. 2015년 <한겨레21>에 연재됐던 시베리아열차 여행기를 바탕으로 살을 붙이고 내용을 보완했다. 교통요금·음식값, 길찾기, 살 만한 기념품 소개와 아울러 “원칙적으로는 음주가 금지된” 시베리아 횡단여행에서 술을 구하는 방법 같은 요긴한 정보도 담겼다.

북한 노동자들이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평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고 있다. 박흥수 사진, 후마니타스 제공
북한 노동자들이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평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고 있다. 박흥수 사진, 후마니타스 제공

우리나라 경부선의 21배에 이르는 9288㎞ 길이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지은이는 이 긴 여정 내내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에 이르는 한반도의 격변기에 연해주·만주·시베리아에서 분투한 한인들을 떠올린다. 해외에서 발간된 최초의 한글 일간지 <해조신문>을 발간했던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 사람들, 1920년 4월5일 일본군에 의해 불타 숨진 ‘신한촌’ 사람들, 적백내전 때 철도레일에 묶여 바다로 수장됐던 목숨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때 배고픔·추위·질병과 싸워가며 가축수송용 차량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떠났던 이들…. 우수리스크, 하바롭스크, 치타, 울란우데, 이르쿠츠크 등 열차가 지나는 곳은 모두 눈물의 길이다.

친일청산이 미완으로 끝나고 독재정권이 집권한 남한에서도, 김일성 1인수령체제를 구축한 북한에서도 조명받지 못한 항일 사회주의자들도 호출한다. 중국 군벌과 러시아 백군에 맞서 돌격전을 벌이다 숨진 김유천을 추모하기도 하고, 상상의 타임머신을 타고 1918년 백군에게 잡혀 목숨을 잃은 ‘조선의 로자 룩셈부르크’ 김알렉산드라를 만나기도 한다. 스탈린에 의해 숙청된 <낙동강>의 작가 조명희,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서 레닌과 이동휘 회담의 통역을 맡았던 김 아파나시(김성우)도 애도한다.

박흥수 기관사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이동한 경로. 후마니타스 제공
박흥수 기관사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이동한 경로. 후마니타스 제공

‘철도 덕후’답게 지은이는 관광객이 잘 찾지 않는, 그러나 철도역사에선 중요한 장소들도 소개한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유럽과 극동의 교두보’로 금메달을 받았던 예니세이 철교가 그렇다. 러시아에서 ‘철의 시대’를 연 100여살의 예니세이 철교 앞에서 그는 “너를 보기 위해 수천킬로미터를 달려왔어! 정말 반갑다!”라고 외친다.

이 여행의 백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가는 동안 같은 칸에서 여행한 북한 노동자들과의 만남이다. 지은이는 건설노동자로 일하러 떠나는 북한의 노동자들과 함께 김밥을 먹고, 담배를 나눠 피고, 전화기를 빌려주고, 술잔을 돌리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어떤 북한 청년들은 남한의 아이패드에 깔린 ‘지구 구하기 게임’에 정신을 팔려 밤을 하얗게 불태운다. 여기에 연변 출신 ‘조선족’ 아주머니까지 합세해 ‘남성과 여성의 역할‘ ‘개인의 행복이 우선이냐, 국가의 번영이 먼저냐’는 주제로 ‘한민족대토론회’까지 벌어진다. 그러나 며칠 동안 허물없이 지내던 북한 노동자들은 여행 막바지에 이르자 ‘인솔팀장’의 지시에 따라 그동안 함께 찍었던 사진을 지워달라고 부탁한다. 지은이는 씁쓸한 마음으로 추억들을 카메라에서 모두 지우고 난 뒤, 언젠가 그들과 평양에서 만나 맛있는 냉면을 먹을 날을 꿈꾼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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