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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등불을 들고 홀로 세상을 지나는 여자

등록 2017-12-28 19:22수정 2017-12-28 19:49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전경린 지음/문학동네·1만3000원

전경린(사진)의 소설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을 관류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등불을 들고 홀로 세상을 지나는 여자”(11쪽)의 이미지다. 거의 동일한 표현이 49쪽과 201쪽에도 나오거니와, 이 이미지는 주인공 나애의 자기 인식을 대표한다. “이마를 비추던 빛이 스러지고 발목이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133쪽)에서 왔을 소설 제목은 그 뒤에 ‘등불’을 덧붙이면 뜻이 좀 더 분명해진다.

등불은 일견 밝고 따뜻하게 다가오지만, 이 소설의 맥락에서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등불이 필요한 상황이란 어둠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다, 그 등불을 들고 ‘홀로’ 세상을 지나는 여자인즉 외롭고 위태롭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소설은 나애와 희도의 사랑으로 문을 열지만, 첫 장의 제목이 ‘임시 동거인’인 데서 짐작되듯 둘의 관계는 잠정적이고 불안하다. 나애와 희도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분명한데, “둘 사이에는 어느새 최초의 간격으로 돌아가는 탄성이 있었다.” 한·일 혼혈인 희도가, 본사가 있는 일본에서 근무하게 된 것을 계기로 둘은 결국 헤어지기로 한다.

전경린
전경린

이 대목에서 나애의 상징인 등불 든 여자 이미지가 다시 나오는데, 그것은 물론 외롭고 위태롭지만 동시에 따뜻하고 안정적이라는 느낌도 풍긴다.

“희도는 떠나지만, 이제 현실의 이름을 지우고 내 안의 세상을 살 차례였다. 나의 안에는 그런 장소가 있다. 한번 일어난 일은 영원히 복기되는 곳,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히 떠돌며 암흑의 틈새에서 꿈으로 삼투되거나 불현듯 날아오르는 그림자 새처럼 이따금 현실의 벽 위에 출몰한다. 그 위로 현실은 계속 흘러가고, 나는 등불을 안고 그 사잇길을 홀로 걸어간다.”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나애에게 ‘현실’과 대비되는 ‘내 안의 세상’이 따로 있다는 것, 현실은 계속 흐르며 변화하지만 나애 안의 그 장소는 영원히 되풀이되며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세상이란 무엇일까. 아홉살 무렵 나애는 아버지가 임지로 발령 받아 좁은 관사로 떠나게 되자 가족과 떨어져 큰아버지의 병원집에 맡겨진다. 그때 재회한 게 유치원 시절 친구 도이와 상. “고아인 도이와 폭력적인 편부슬하의 상과 정신적으로 사고무친인 나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두번째 집에 입양된 아이들처럼.” 나애의 안에 있는 세상이란 도이와 상, 그리고 병원집 종려할매와 오원 언니 등으로 이루어진 교감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그것은 불안하고 고독한 나애의 현실을 비추는 등불 같은 기억이다.

전경린
전경린

이로부터 소설은 희도와 헤어진 뒤 나애의 현재 이야기와 병원집 시절 기억을 오가며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어린 나애가 병원집에 가기 전에도 엄마한테 버림받았던 기억이 있다는 사실, 아마도 그 때문인 듯 평생 “가족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나애가 희도는 물론 그 이전 남자들과 관계 맺기에 애를 먹는 데에는 이런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크게 작용한다. “어릴 때 사랑에 굶주리면 어른이 되어서도 바깥을 떠돌게 된단다.” 병원집 오원 언니가 말한 대로였다.

나애와 희도는 이대로 영영 헤어지는 것일까. 희도를 만나기 전 10년 가까이 동거했으며 나애 스스로 “삶에 대해 내가 꾸었던 유일한 꿈”이라 말하는 강과 다시 만날 가능성은 없는 걸까. 이제는 늙어 무기력해진 엄마와 화해할 여지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책을 읽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두자.

최재봉 기자, 사진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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