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인 2월4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제14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추위도 잊은 채 박근혜 당시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3.5%가 넘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비폭력 시민 저항운동은 항상 성공한다.’
미국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웨스의 연구 이야기다. 체노웨스는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는 “힘은 결국 총구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폭압적인 독재 정권이 저항하는 모든 이를 온갖 공권력을 동원해 억압할 때, 시민들이 어쩔 수 없이 폭력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체노웨스는 비폭력 저항이 오히려 효과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탱크를 맨몸으로 막아선 사람의 사진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중국의 천안문 사태를 보자. 중무장한 탱크에 맞선 사람들이 과연 무얼 할 수 있었을까. 폭력적 저항운동이 더 효과적이라는 의견에 반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비폭력 저항운동의 효율성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만난 체노웨스는 폭력성이 저항운동의 성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본격적으로 연구해보기로 결심하게 된다. 폭력 저항이 정치권력의 전복에 더 효과적이라는 자신의 가설이 과거 기록으로 확증될 수 있다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1900년부터 2006년 사이에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시민 저항운동 중 독재정권을 전복시키거나 지역적인 민주화로 이어진 최소한 수천명이 참여한 수백건의 사례를 모았다. 저항의 폭력성과 저항운동의 성공의 관계를 치밀하게 살펴보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비폭력 저항운동이 폭력 저항운동에 비해 무려 두 배 이상의 성공률을 보였다.(참고로, 테러 집단에 의한 저항운동의 성공률은 극히 낮다는 것은 다른 연구에서 이미 밝혀진 바 있다.) 구정권이 폭압적인 방식으로 억압하는 사례들로 좁히면, 비폭력 저항운동의 성공률은 무려 6배 이상이었다.
연구에서 얻어진 다른 결과도 못지않게 흥미롭다. 저항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인구의 3.5%를 넘은 ‘모든’ 저항운동은 성공했다는 것이다. 3.5%가 적은 숫자는 아니다. 5000만이 넘는 우리나라라면 거의 200만명, 미국이라면 무려 1천만이 넘는 숫자다. 흥미로운 점은 더 있다. 3.5%를 넘긴 모든 저항운동은 하나같이 다 비폭력적이었다는 점이다. 즉, 비폭력 저항운동의 성공률이 더 높을 뿐 아니라, 참여자의 수도 더 많았다. 비폭력 저항운동의 평균 참여자 수는 폭력적인 저항운동의 무려 네 배였다.
진입장벽 낮아 성공 가능성 커져
왜 비폭력 저항운동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지는 쉽게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폭압적인 권력에 대항해, 폭력 저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사실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체포되어 투옥될 수도,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다. 대부분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비폭력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저항운동은 다르다. 참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진입장벽이 낮다. 방법도 다양해 많은 이가 함께할 수 있다. 시위 때 시간을 맞춰 자동차의 경적을 울리거나, 집의 전등을 동시에 잠깐 끄는 것만으로도 함께할 수 있다. 비폭력 저항의 이러한 개방성으로 말미암아, 특정 집단이 아닌 시민 다수를 치우침 없이 대변할 가능성도 훨씬 크다. 비폭력 저항을 정부가 폭력적으로 진압하면, 많은 경우 이후 사건이 전개될수록 저항운동 쪽이 더 많은 지지층을 획득하게 된다. 특히 폭력적인 진압에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항할 때 더욱 그렇다. 즉, 구정권의 폭력 진압으로 비폭력 저항운동의 성공 가능성은 오히려 커진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구정권의 유지를 돕는 역할을 했던 공권력의 충성도는 줄어들게 된다는 것도 중요하다. 체노웨스가 전한, 밀로세비치(옛 유고슬라비아 독재자, 1941~2006)의 하야를 요구하는 세르비아의 평화적인 시위대에 총을 겨눈 경찰의 말이다. “내 아이가 저 시위대에 있을지 모르는데 방아쇠를 당길 수는 없었어요.” 이 정도로 상황이 진전되면 친정부 쪽 사람들의 이탈은 이어지고, 이로 인해 비폭력 저항운동은 더 큰 힘을 갖게 된다. 운동 참여의 낮아진 진입장벽은 더 많은 참여자를 만들고, 이렇게 늘어난 참여자 수는 진입장벽을 더욱 낮춘다. 연구에서 얻어진 다른 결과도 있다. 저항이 성공한 후 민주적인 정부가 출현할 가능성도, 비폭력 저항일 때가 폭력 저항일 때보다 훨씬 더 컸다고 체노웨스는 전한다.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체노웨스의 멋진 강연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가 마리아 스테펀과 공저한 논문의 제목은 ‘Why Civil Resistance Works’(시민 저항운동이 통하는 이유)이다.
소개할 논문이 하나 더 있다. 체노웨스의 연구와 직접적인 관련은 별로 없어 보이는 물리학 분야의 연구다. 세스 마블, 스티븐 스트로개츠 등의 과학자가 함께 쓴 ‘Encouraging Moderation: Clues from a Simple Model of Ideological Conflict’(중도의 힘: 이데올로기 경쟁의 단순 모형으로 본 단서)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홍현숙 전북대 물리학과 교수도 논문 저자로 참여했다. 이 논문의 모형은, 물리학 분야 논문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아주 단순하다. A라는 의견과 B라는 의견이 공존할 수 있는 가상 사회에 대한 모형 연구다. 의견 A를 가진 사람이 의견 B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기존의 신념에 대한 확신이 약해지는 상태가 된다(이 상태를 논문에서는 AB라고 불렀다. B도 마찬가지여서 A를 만나면 AB 상태가 된다). AB 상태인 사람이 다음에 B를 만나면 B의 의견을 가지게 되지만 A를 만나면 A의 의견을 가지게 된다고 논문에서는 가정했다. 논문에서는 흥미로운 요소를 하나 더 넣었다. 즉, 항상 A를 고수하는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한 거다(이들을 Ac라고 불렀다).
‘광화문 촛불’ 성공 경험 쉽게 못 잊어
이쯤에서 이 물리학 논문을 저항운동에 대한 체노웨스의 연구와 비교해 보자. B는 구정권을 옹호하는 사람들로, Ac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저항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B의 의견이 대부분인 상태에서 출발한 가상 사회가 최종적으로 모두 A의 의견을 갖는 상황으로 수렴하려면 Ac는 도대체 몇 퍼센트 이상이 되어야 할까. 모형의 해석적인 결과에 따르면 Ac가 13.4%가 되기 전에는 B가 다수지만 13.4%를 넘는 순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이를 통계물리학에서는 ‘상전이’라 부른다), 결국 B 의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태로 수렴하게 된다.
현실과 다른 간단한 모형이긴 하지만 체노웨스 연구의 3.5%에 해당하는 숫자가 바로 이 물리학 논문의 13.4%라 할 수 있다. 두 숫자의 크기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지만, 이 물리학 논문에서도 체노웨스의 연구와 비슷한 정성적인 결과를 얻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즉, 딱 13.4%의 사람이 굳건한 신념을 가지고 노력하면 사회 전체를 변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논문을 읽고는 폭력/비폭력의 요소를 모형에 추가해 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관심 있는 분은 연락 주시라.)
이번 글에서 1년 전 겨울의 서울 광화문광장을 떠올리는 독자가 많을 거다. 체노웨스의 연구에 견주어 살펴보면 촛불혁명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시위가 축제처럼 진행돼 사람들이 즐겁게 참여했다. 시위에 폭력성이 없으니 공권력도 폭력적일 이유가 없었고, 경찰이 폭력적이지 않은데 시위대도 굳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시위할 필요도 없었다. 시위에 참여한 일부 소수가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려 할 때마다 다수의 참여자가 이를 저지했다. 경찰 버스에 붙은 전단지를 떼어주고, 거리의 쓰레기를 치우는 등 성숙한 시민의식도 보여주었다. 촛불혁명의 진행 과정을 소수의 명망가가 주도하지 않은 것도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촛불의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직접 겪어 깨닫게 된 점이 있다. 변화는 소수의 훌륭한 지도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많은 사람이 함께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작년의 촛불은 광화문광장만을 밝힌 것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나라의 미래도 함께 밝게 만들었다. 촛불을 함께 든 사람들은 성공한 경험을 쉽게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다시 또 위협받는 날, 우린 다시 또 즐겁게 두려움 없이 촛불을 들게 될 것이 분명하다.
오늘 소개한 체노웨스의 실증적인 연구를 나름대로 정리해보았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는 잘 자랄 수 없다.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려면, 평화적인 다수의 따뜻한 보살핌이 더 소중한 것이 아닐까.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