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유고집 ‘목련꽃 필 무렵 당신을 보내고’ 나온 고 이춘기씨
최근 학지사가 펴낸 책 <목련꽃 필 무렵 당신을 보내고>는 ‘복숭아밭 농부 이춘기 옹의 30년 일기’란 부제를 달고 있다. 고 이춘기씨는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전북 익산군 춘포면 용연리(속칭 대장촌)에서 태어나 복숭아 과수원을 일구다 1990년 아들들이 터잡고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리고 1년 만에 생애를 마쳤다. 60년대 익산원예협동조합 조합장을 지낸 게 유일한 공적 활동이다. 하지만 그가 30년 동안 써내려간 일기엔 ‘소규모 자작농 이춘기’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61~90년 일기 30권 발췌 수록
3·1만세 장터에서 교회 ‘꽃주일’까지
아내 사별 뒤 남편 어려움 ‘생생’
삽화도 전문가 못지 않은 솜씨 90년 미국 이민 뒤 1년만에 별세
이복규 교수 엮어 27년만에 햇빛
“시대 세시풍속 증언한 귀한 사료” 일기는 미국에 살고 있는 고인의 넷째 아들 종실씨가 3년 전 박성수 서울대 명예교수(고인이 처고모부)에게 건네면서 출판으로 이어졌다. 고인은 여섯 아들을 뒀다. 장남 종화씨는 캐나다, 넷째와 막내 종대씨는 미국, 다섯째 종인씨는 중국에서 살고 있다. 차남 종성씨와 셋째 종정씨는 작고했다. 여섯 아들 모두 대학을 졸업했다. 특히 장남 종화씨는 상공부 수출과장을 지낼 때 ‘수출 1억달러 달성’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차남은 어머니가 별세하던 해인 61년 국제로터리클럽 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 게이오대 경제학부로 유학을 떠나 박사 학위를 받았다.
책에는 30년치(1961~90) 일기의 약 15% 분량이 실렸다. 61년과 62년치가 대부분 실렸고 그 뒤는 선별해 담았다. 고인의 아내 김정순씨는 61년 1월 간암이 발병해 고통스런 투병 생활을 하다 그해 4월17일 사망했다. 그러니까 일기의 상당 부분은 죽어가는 아내를 지켜보는 남편의 애통한 심경과 사별한 뒤 남겨진 어린 두 아들(종인·종대씨)를 홀로 키우며 겪는 어려움에 대한 얘기다.
일기를 책으로 엮은 이복규 서경대 교수는 2일 전화 통화에서 “사별 전후 일기가 생생해 그 기록을 중심으로 책을 냈다”고 했다. 기록은 개인사이면서 또한 사회사이기도 하다. 예컨대 일기는 당시 암 환자와 그 가족이 겪는 고초가 어떤 것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아내가 검진을 위해 연세대세브란스병원 입원 수속을 밟을 때, 이씨는 일주일치 입원비 6만환을 선불로 내야 했다. 그 뒤 서울대병원에 갔을 때는 이전의 세브란스병원 자료를 “탈취하다시피 해서 건네주고 막대한 비용이 드는 종합검진을 생략”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거친 뒤에야 서울대병원으로부터 “간장에 암이 생겼다”는 최종 통고를 받았다. 수술을 한 것도 아닌데 “어디서 좋은 약이 있다면 사와야 하고, (약을 사러) 왔다 갔다 하는 비용” 때문에 빚더미에 앉았다.
61년엔 종인씨가 13살, 종대씨가 10살이었다. 엄마는 말기암 투병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종인의 중학 입학 시험에 노심초사한다. 합격 소식에 병석에서 눈물을 흘린다. 종인의 등록금 마련에 속이 타는 남편에게 “누워서 자기 농 속의 그릇을 내오라”고 했단다. “(아내가) 그 속에서 현금 5만환을 내놓는다. 눈이 번하다. 백난 중에라도, 두고두고 꼭 종인이 입학에 쓰려고 예비했다고.”(61년 3월30일치 일기 중)
3·1운동이나 한국전쟁과 같은 격변의 역사에 대한 증언도 나온다. 고인은 13살 때 조부 제수를 사러 온 이리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체험했다. “장사꾼, 장꾼 할 것 없이 온 장판에 만세소리 충천하고 사람들이 전부 공중으로 날아다니는 것만 같다.” “모자를 공중에 던지고 서로 두루마기 자락을 잡고 날뛰었다.” 그해 신식학교를 가기 위해 땋은 머리를 자르고 까까머리를 한 뒤 할머니와 같이 울었던 소년의 눈에 비친 3·1 만세운동이다. 고인은 그 뒤 일제의 3·1운동 예비검속 요시찰 명단에 올라 일기와 편지 뭉치를 압수당한 채 일경에 끌려갔다. “그때에는 중학만 나와도, 신문만 보아도, 양복만 입어도 요시찰 대상이다”라고 썼다. 이복규 교수는 일기의 이 대목을 근거로 “고인이 평생 일기를 써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한국전쟁 땐 인민군 치하에서 ‘우익정치, 무기은닉’이란 죄명으로 일주일간 투옥되기도 했다. 미군 폭격 때 동네 민가에 폭탄이 떨어져 “사람이 10여명 날아가 버리고, 동네는 못(연못)이 되었다”는 기록도 남겼다.
지금은 사라진 ‘꽃주일’이나 동네 단위의 정월대보름 행사에 대한 기록은 당시 풍속을 알려주는 귀한 자료라고 이 교수는 전했다. “일기를 보면 60년대만 해도 어린이날에 교회들이 교파를 초월해 아이들을 함께 데리고 나와 꽃주일 행사를 했어요. (교회별로 행사를 하는) 지금과는 다르죠.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죠.”
일기엔 고인이 직접 그린 삽화가 나온다. 일기장 상단 여백을 주로 활용해 그렸다. “삽화 솜씨가 뛰어나 처음엔 고인의 작품인지 의심했죠. 노년이 되면서 일기도 길어지고 삽화도 늘어나죠.” 이 교수는 “고인의 문장이 워낙 좋아 한자나 사투리 외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고 했다.
“60~70년대 농촌 일기가 일부 나와 있지만, 대부분 지주나 소작농의 관점에서 쓴 거예요. 이춘기 선생 일기는 소규모 자작농 인텔리(지식층)의 시각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어요. 개인의 자연발생적 기록은 역사를 왜곡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이 교수는 “고인의 일기는 특히 가정을 지키던 아내가 사라졌을 때 그 공백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일기를 읽으면 ‘아내에게 잘해야겠다’는 교훈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고 이춘기씨. 이복규 교수 제공
3·1만세 장터에서 교회 ‘꽃주일’까지
아내 사별 뒤 남편 어려움 ‘생생’
삽화도 전문가 못지 않은 솜씨 90년 미국 이민 뒤 1년만에 별세
이복규 교수 엮어 27년만에 햇빛
“시대 세시풍속 증언한 귀한 사료” 일기는 미국에 살고 있는 고인의 넷째 아들 종실씨가 3년 전 박성수 서울대 명예교수(고인이 처고모부)에게 건네면서 출판으로 이어졌다. 고인은 여섯 아들을 뒀다. 장남 종화씨는 캐나다, 넷째와 막내 종대씨는 미국, 다섯째 종인씨는 중국에서 살고 있다. 차남 종성씨와 셋째 종정씨는 작고했다. 여섯 아들 모두 대학을 졸업했다. 특히 장남 종화씨는 상공부 수출과장을 지낼 때 ‘수출 1억달러 달성’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차남은 어머니가 별세하던 해인 61년 국제로터리클럽 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 게이오대 경제학부로 유학을 떠나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 이춘기씨의 일기. “어제 밤에는 혼자서 누웠으니 사방에 산재한 자식들의 생각이 떠올라 늦게야 잠이 들었다”란 문장으로 시작된다. 빽빽한 글과 삽화에서 ‘노년의 시간과 고통’을 엿볼 수 있다.
이복규 서경대 교수
고 이춘기씨의 일기.
고 이춘기씨의 일기.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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