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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인권’의 눈으로 감상하는 미술

등록 2018-01-11 19:24수정 2018-01-11 19:58

만화 그리는 인문학자 김태권
타자화, 주변화된 사람들 조명
섣부른 판단 대신 성찰과 배려를

불편한 미술관-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김태권 지음/창비·1만6000원

‘좋은 예술’이 뭐냐 묻는다면 낯선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답하겠다. 좋은 예술은 다수의 ‘당연한 생각’을 답습하지 않고 균열을 낸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인권이 확대되는 과정도 그러했다. 다수의 당연함에 물음표를 다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꿨다. 만화가이자 인문학자인 김태권은 예술과 인권이 만나는 이 지점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독자들에게 계속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책은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에선 미술 작품에서 대상화, 타자화, 주변화되는 사람들을 조명한다. 여성, 빈민, 장애인, 이주민, 성폭력 피해자, 성소수자, 학살당한 사람들, 감금·구속된 이들,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는 사람들이 주제다. 예술작품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느냐는 기본적으로 시선의 문제다. 성경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수산나는 정원에 침입한 2명의 노인 재판관에게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다. 여러 화가들이 <수산나와 두 노인>이라는 같은 제목으로 이 장면을 그렸는데, 작가들의 ‘인권 감수성’에 따라 표현과 메시지가 다르다. 렘브란트의 그림(1647년)에서 수산나는 또렷하고도 간절한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나를 잊지 말아달라”며 독자들에게 구조신호를 보내는 듯하다. 그러나 게르치노(궤르치노)의 작품(1617년)은 벌거벗은 수산나의 육체를 게걸스럽게 쳐다보는 노인들에게 초점을 맞추며 남성들의 관음증을 자극한다. 수산나는 관객들에 의해 2차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작품(1610년께)은 다르다. 수산나의 공포, 절망을 생생히 전달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고통에 공감하게 만든다.

17세기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가 그린 ‘수산나와 두 노인’(1610년께). 김태권은 성폭력을 당하는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작품으로 평가한다. 창비 제공
17세기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가 그린 ‘수산나와 두 노인’(1610년께). 김태권은 성폭력을 당하는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작품으로 평가한다. 창비 제공
게르치노의 ‘수산나의 두 노인’(1617년). 김태권은 성폭력 가해자도 관객도 공범으로 만들어버리는 관음증이 담겨 있다고 비판한다. 창비 제공
게르치노의 ‘수산나의 두 노인’(1617년). 김태권은 성폭력 가해자도 관객도 공범으로 만들어버리는 관음증이 담겨 있다고 비판한다. 창비 제공

똑같은 그림이라도 감상 주체에 따라 맥락이 달라지기도 한다. 미국 흑인민권 운동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이룬 ‘루비 브리지스 사건’을 다룬 <우리가 함께 사는 문제>(노먼 록웰·1967년)는 백인만 다니던 초등학교에 입학한 흑인 소녀 루비를 인종주의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보안관들이 통학길을 지키는 장면을 묘사했다. 루비가 당당히 고개를 들고 걸어가는 거리 담벼락엔 ‘검둥이’(nigger)라는 욕설이 적혀 있다.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는 취임 이후 이 작품을 백악관 벽에 걸었다. 그러나 이 그림이 만약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 벽에 걸려 있었다면 어떻게 읽혔을까? 또 하나의 흑인혐오 소행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지은이는 “같은 행동과 말도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인종주의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세바스티안 데모라의 초상’(1645년께). 만화가 김태권은 에스퍄냐 궁정의 광대를 사실적으로 그린 이 작품은 비장애인을 그리는 방식과 다르지 않게 주인공을 묘사했다고 평가한다. 창비 제공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세바스티안 데모라의 초상’(1645년께). 만화가 김태권은 에스퍄냐 궁정의 광대를 사실적으로 그린 이 작품은 비장애인을 그리는 방식과 다르지 않게 주인공을 묘사했다고 평가한다. 창비 제공

비록 정답은 제시할 수 없지만 답을 찾아가는 고민을 모은 2부는 이 책의 ‘사려깊음’이 잘 드러난 대목이다. 히틀러를 미화한 그림에 총격을 가하는 것은 정치적 올바름과 별도로 표현의 자유에 위배되는 것이 아닐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끝까지 백인 주인 스칼릿을 섬기는 흑인 노예 ‘마미’를 등장시켜 욕을 먹었지만, 정작 마미를 연기한 여배우는 이 영화 덕분에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흑인 여배우가 됐다.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요즘 한국인들이 많이 쓰는 ‘흑형’이란 표현은 친근함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지만 또 하나의 인종차별적인 단어가 아닌가?(실제로 케냐 출신 방송인 샘 오취리는 자신을 흑형 대신 ‘오취리 형’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미국의 길거리 예술가 셰퍼드 페어리는 인종주의를 부추기는 트럼프를 비판하는 포스터 연작 <위 더 피플>(We The People)을 디자인하면서 성조기를 히잡처럼 쓴 여성을 그렸다. 무슬림도 미국사회의 일원이라는 뜻이었지만 히잡으로 상징되는 무슬림 성차별주의를 용인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누구 말이 옳은지 혼란스럽다.

2009년 미나레트(이슬람 사원에 세우는 첨탑) 신축 금지에 대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극우민족주의정당인 스위스국민당에서 만든  투표 장려 포스터. 미나레트를 마치 유럽을 공격할 미사일처럼 표현했다. 창비 제공
2009년 미나레트(이슬람 사원에 세우는 첨탑) 신축 금지에 대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극우민족주의정당인 스위스국민당에서 만든 투표 장려 포스터. 미나레트를 마치 유럽을 공격할 미사일처럼 표현했다. 창비 제공
빈센트 반 고흐의 ‘재소자들의 산책’(1890년). 작품을 완성할 당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고흐는 재소자들의 무리 속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창비 제공
빈센트 반 고흐의 ‘재소자들의 산책’(1890년). 작품을 완성할 당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고흐는 재소자들의 무리 속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창비 제공

지은이는 섣불리 흑백을 판단할 수 없는 복잡한 논의 지형을 단칼에 정리하는 대신 신중함과 성찰을 강조한다. “우리 주위에서 마주치는 인권의 문제는 선과 악의 대립보다 ‘배려하는 생활’ 대 ‘무신경한 태도’라는 구도로 보아야 할 때가 많다.” 이 때문에 내 언행이 남을 불편하게 하지는 않는지, 남의 언행에 나는 왜 불편해졌는지 차근차근 따져볼 일이다. 지은이는 “책장을 덮은 후 독자님 마음에 불편함의 아주 작은 불씨가 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귓속말로 속삭이듯 당부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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