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고은 지음/발견·1만2000원
고은(사진)의 시집 <어느 날>은 ‘어느 날 1’부터 ‘어느 날 217’까지 일련번호가 붙은 연작시들로 이루어졌다. 서문에 따르면 시인은 장편 서사시집 원고를 마치고 책으로 내기 위해 교정을 보던 ‘틈서리’에 이 연작을 썼다. ‘어느 날 208’에서 그는 두세개 생애에 걸쳐 “시 몇십만 수”를 쓰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하는데, 200편 남짓한 단시란 그에게는 점심과 저녁 사이에 먹는 간식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들은 짧게는 2행에서 길어야 10행 안팎까지로 매우 단출하다. 한쪽을 넘는 시가 많지 않고, 유일하게 세쪽에 이르는 연작 73편은 시 마지막에서 “3행이나/ 5행으로 쓸 것을/ 위와 같이 장황하였다 이상”이라며 독자에게 미안한 기색을 비치기도 한다. 짧은 분량이라서 시를 위한 메모처럼 읽히는가 하면, 특유의 파격과 전복적 진술은 선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공산당이 필요하다/ 나와 다른 것/ 기독교가 필요하다/ 나와 다른 것// 다른 것이 있으므로/ 가까스로 나는 나 아닌가”(‘어느 날 30’ 전문)
“한 번도/ 나는 하나의 나인 적 없어”(‘어느 날 119’ 부분)
‘나’의 동일성 또는 단일성을 거부하고 차이에 기반한 관계적 정체성을 선언하는 것으로부터 이 연작은 출발한다. ‘나’란 고정된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나’와 다른 것들이 나를 비로소 나로 가능하게 한다는 인식이다. 이런 생각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부터 데리다의 해체론에 이르는 서구 현대 사상을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수천년 전 불교와 도교 같은 동양 사상에 뿌리를 둔 생각이다. 불교의 연기론이 천체물리학의 빅뱅이론과 만나는 지점을 시인은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노래한다.
“내 할아버지도 나도 어찌어찌/ 밤하늘 옛 별들의 티끌에서 왔어// 몇백 광년의 저쪽이/ 내 핏줄인 것을 위하여/ 참이슬하고 카스하고 섞어// 멋쩍은 폭탄주 건배”(‘어느 날 189’ 부분)
“노을은 친가이다/ 밤은 외가이다/ 다음날 아침은 사돈이다// 이런 핏줄 속에서/ 남 있다니/ 원수 있다니”(‘어느 날 61’ 전문)
시인에 따르면 지구상의 만인과 만물은 모두가 핏줄이며 친족이다. 척지거나 다툴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얼굴을 붉히고 험한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해칠 기회를 노리는 것이 또한 어리석은 인간이다. 시인이 이 연작을 쓸 무렵 미국 대통령 트럼프와 북의 김정은이 특히 그러했다. “나 부끄러웠어 북핵하고 트럼프하고 거품 무는 날”(‘어느 날 164’)이라며 어항 속 금붕어들에게 부끄러워하던 시인은 연작 195편에서는 임박한 위기 앞에 불안과 공포를 숨김 없이 드러낸다.
“나는 선언한다// 나는 보수다 보수의 앞이 아니라 뒤이다/ 나는 대한민국 이승만 이래의 보수 또는 보수반동이 아니다/ 내 조상들의 삶에 명멸한/ 고려산천의 보수이다// 이대로 치달리다가는/ 이러다가는/ 이러다가는/ 내일 아침부터 해 뜨지 않으리라 시 죽으리라”(‘어느 날 195’ 전문)
천지동근 만물일체(天地同根 萬物一體)의 친족 이념과 눈앞의 불안한 현실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 주는 것은 역시 시인의 전매특허라 할 선시적 비약이다. “아직 못 쓴 시 미안하이// 아직껏 못 산 삶/ 그대도 미안하이”(‘어느 날 39’)라거나 “내 궁극// 한 줄의 시/ 그 너머/ 한 줄도 없는 시”(‘어느 날 29’ 전문)라는 구절을 접하면 독자는 문득 눈앞이 환히 트이는 선적 개안(開眼)의 경험을 할 법하다.
최재봉 기자,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