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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오즈의 마법사’에 화폐투쟁이 담겼다고?

등록 2018-02-01 19:34수정 2018-02-01 19:45

동화경제사-돈과 욕망이 넘치는 자본주의의 역사
최우성 지음/인물과사상사·1만5000원

소식이 끊긴 엄마를 찾겠다며 혼자 집을 떠난 13살 소년 마르코, 남자아이 입양을 원한다는 사실에 주근깨 가득한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지던 앤 셜리, 도망 노예와 함께 미시시피강을 노저어 가는 허클베리 핀.

어린 시절 눈물과 웃음으로 범벅을 만들었던 동화 속 친구들이 사회경제사의 렌즈를 거쳐 다시 찾아왔다. 경제학 전공자이자 현직 기자가 쓴 <동화경제사>는 이야기 배경이 된 시대적 상황, 행간에 담긴 지은이의 메시지와 은유, 작품이 사회에 끼친 영향 등을 짚으며 동화 속 캐릭터들을 ‘현실’로 끌어당긴다.

이 책에서 다룬 15편의 동화 중 8편은 산업혁명의 확산, 자본주의 시스템의 확립과 함께 생산·무역·금융망이 조밀해지고 계급별·국가별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1800년대 후반부에 출간됐다. 가난한 성냥팔이 소녀가 거리에서 죽은 때는 감자마름병의 재앙이 유럽을 휩쓴 대기근(1845~47년)의 시대였다. 성냥은 당시 ‘핫 아이템’이었다. <성냥팔이 소녀>가 출간되기 한 해 전인 1844년, 안정적인 마찰·발화 방식으로 사고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줄인 ‘안전성냥’이 발명됐다. 그러나 성냥에 들어가는 백린은 인체에 매우 해로웠다. 성냥팔이 소녀는 동사했지만 성냥공장에 취직한 소녀들은 산업재해로 죽어갔다. 성냥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이도 있었는데, 세계성냥 생산의 75%를 차지했던 스웨덴의 ‘성냥왕’ 이바르 크뤼게르는 공격적 투자를 일삼다 피라미드 사기극이 탄로나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윌리엄 포그가 세계여행을 떠난 때는 프랑스에서 ‘애국투자’ 열풍을 일으키며 수에즈운하(1869년 완공), 6093㎞의 미 대륙횡단철도(1869년 완공), 봄베이-캘커타 간 2127㎞에 이르는 인도반도철도가 놓인(1870년) 직후였다. 포그는 이런 인프라를 이용해 정확히 79일5분 만에 지구를 횡단한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토목건설은 과잉투자를 불러일으켰고 역사상 최초의 글로벌 불황(1873년)이 발생한다. “세상은 더 가까워졌지만 위기는 더 빨리 퍼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1894년 오하이오 출신 사업가 제이콥 콕시는 수천명의 실업자들과 함께 화폐공급 확대, 정부의 불태환지폐 직접 발행 등을 주장하며 미국 땅을 동서로 가로질러 워싱턴 디시까지 행진했다. ‘콕시의 군대’라고 불린 이들의 시위는 <오즈의 마법사> 주인공 도로시가 강아지·사자·양철나무꾼·허수아비와 함께 에메랄드시티를 찾아가는 여정을 연상케 한다.  인물과사상사 제공
1894년 오하이오 출신 사업가 제이콥 콕시는 수천명의 실업자들과 함께 화폐공급 확대, 정부의 불태환지폐 직접 발행 등을 주장하며 미국 땅을 동서로 가로질러 워싱턴 디시까지 행진했다. ‘콕시의 군대’라고 불린 이들의 시위는 <오즈의 마법사> 주인공 도로시가 강아지·사자·양철나무꾼·허수아비와 함께 에메랄드시티를 찾아가는 여정을 연상케 한다. 인물과사상사 제공

<오즈의 마법사>(1900년)를 ‘화폐투쟁’으로 읽는 것도 흥미롭다. 이 책이 나오기 4년 전인 1896년 미국 대선은 금만 화폐로 인정할 것이냐, 은도 함께 인정할 것이냐를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진 ‘화폐선거’였다. 1873년 실시된 금본위제의 여파는 서부 농민들에게 심각한 불황의 타격을 입혔고, 이들을 기반으로 ‘인민당’이 생겨난다(1892년). 1896년 선거에선 금본위제의 공화당이 이겼지만, 동화에선 도로시의 ‘인민주의’가 승리한다.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묻기 위해 도로시는 ‘노란 벽돌길’(금본위제)을 따라 ‘에메랄드시티’(금권정치가 횡행하는 수도 워싱턴)를 찾아갔으나 믿었던 마법사는 가짜로 밝혀지고(공화당의 클리블랜드 대통령), 결국 자기가 신고 있던 은구두(은본위제)야말로 어디든 갈 수 있는 마법의 신발임을 깨닫는다.

캐나다 페미니스트 1세대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빨간머리 앤의 입을 통해 “레이철 아주머니는 여성들도 투표할 수 있게 된다면 곧 좋은 변화가 생길 거래요”라며 여성참정권을 옹호한다든지, 로빈슨 크루소를 자본주의 기율을 준수하고 투자에 능한 자수성가형으로 묘사한 작가 대니얼 디포가 악명 높은 투기광풍으로 기록된 ‘남해주식회사’에 투자했다가 돈을 몽땅 날린 일화들이 깨알재미를 선사한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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