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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계급갈등의 생생한 현장, 범죄소설

등록 2018-02-01 19:38수정 2018-02-01 19:55

계정민 교수 ‘범죄소설의 계보학’
영미 범죄소설 역사와 흐름 속
민중문학 닮은 뉴게이트소설 주목

범죄소설의 계보학
계정민 지음/소나무·1만8000원

“언제 법이 나를 보호해주었는가? 법이 가난한 자를 보호해준 적이 있는가? (…) 그런데도 당신들은 그를 목매달아 버린다. 그가 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들이 그를 헐벗고 굶주리게 내버려두었기 때문인데도!”

법률과 제도가 가난한 이들에게 얼마나 적대적인지를 웅변하는 이 말은 19세기 영국 작가 에드워드 조지 불워 리턴(1803~1873)의 소설 <폴 클리퍼드>(1830)의 주인공 클리퍼드의 외침이다. 불워 리턴은 영화와 어린이용 각색본으로 유명한 역사소설 <폼페이 최후의 날>의 작가다. 그러나 그가 추리소설의 전신(前身)이라 할 ‘뉴게이트 소설’의 창시자이며 <폴 클리퍼드>가 그 장르의 첫 작품이라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영문학자인 계정민 계명대 교수(작은 사진)는 첫 저서 <범죄소설의 계보학>에서 뉴게이트 소설에서 추리소설을 거쳐 하드보일드 추리소설로 이어지는 영·미 범죄소설의 흐름과 성격을 탐구했다. 특히 소설에 묘사된 범죄의 발생과 해결 과정이 당대 사회의 계급 갈등을 어떻게 반영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거시적이며 사회경제적 시야를 확보한 점이 돋보인다.

추리소설을 비롯한 범죄소설이 계급 갈등을 반영하거나 순치시킨다고, 연구서 <범죄소설의 계보학>에서 영문학자인 계정민 계명대 교수는 주장한다. 사진은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을 각색한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홍보용 스틸 사진. 이십세기폭스사 제공
추리소설을 비롯한 범죄소설이 계급 갈등을 반영하거나 순치시킨다고, 연구서 <범죄소설의 계보학>에서 영문학자인 계정민 계명대 교수는 주장한다. 사진은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을 각색한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홍보용 스틸 사진. 이십세기폭스사 제공

뉴게이트 소설이란 런던의 뉴게이트 감옥에서 처형된 범죄자들의 일대기를 담은 <뉴게이트 캘린더>에 등장하는 이들을 주인공 삼은 소설을 가리킨다. 불워 리턴은 자신의 어머니 소유 말 한 필을 훔친 범인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지는 것을 보고 “피비린내 나는” 영국 형법에 대한 저항 의식을 담아 <폴 클리퍼드>를 쓴다. 소설 서문에서 그는 범죄자가 불평등한 사회적 환경의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불우하고 가난하게 성장해 소매치기 누명을 쓰고 복역하다가 탈옥한 뒤, 노상강도단을 조직해 귀족의 집을 털다 체포되어 다시 재판을 받은 클리퍼드가 대표적이다. 앞서 인용한 말은 법정에서 그가 판사에게 하는 항변이다.

불워 리턴의 또 다른 소설 <유진 아람>(1832)과 윌리엄 에인즈워스(1805~1882)의 <룩우드>(1834)와 <잭 셰퍼드>(1839), 그리고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1838) 등을 통해 특히 노동계급 사이에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뉴게이트 소설은 그 급진성과 전복적 성격에 긴장한 당국의 탄압과 회유 때문에 급속히 몰락의 길을 걷는다.

계정민 교수
계정민 교수

계정민 교수에 따르면 <올리버 트위스트>는 뉴게이트 소설이자 동시에 반(反) 뉴게이트 소설이다. 하층민 범죄자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뉴게이트 소설과 맥을 같이하지만, 그들의 범죄가 불평등한 사회적·계급적 환경의 산물이기보다는 선천적 품성임을 암시하고, 범죄자들을 영웅으로 묘사한 뉴게이트 소설들과 달리 그들에 대한 처벌과 응징을 강조했다는 이유에서다.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추리소설적 요소가 뉴게이트 소설의 불온성을 제거하는 데 동원되었다면, 19세기 중후반 이후 본격 등장한 추리소설은 체제 순응적 색채를 노골화한다. 범죄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확보했던 뉴게이트 소설들과 달리 추리소설에서 ‘말하는 자’는 셜록 홈스와 같은 탐정일 뿐이다. 상류계급 출신 백인 남성인 그 탐정은 “범죄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원인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처럼 드물게 인기를 얻은 여성 탐정은 노처녀이며 정치적으로는 보수적 견해를 지닌 인물이어서 체제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여야 했다.

계정민 교수
계정민 교수

추리소설이 거세시킨 체제 전복적 성격을 되살린 것이 1920~30년대 미국에서 나타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었다. 상류계급 출신 탐정이 하류계급 출신 범죄자를 체포한다는 기본설정에서부터 계급적 성격을 분명히 한 추리소설과 달리,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서는 지배계급과 자본가 계급이 범죄자로, 노동계급과 하위계급이 범죄의 피해자로 그려진다.” 거칠고 폭력적인 남성성이 부각되고 팜파탈이 등장하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등장은 빈부격차가 극심해진 시기 “노동자계급의 좌절과 분노를 보여주었다”고 계 교수는 파악한다.

그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뉴게이트 소설은 80년대 민중문학을 연상시키는 전복적 성격에다 문학성 역시 뛰어난데 국내에는 전혀 번역돼 있지 않아 안타깝다”며 “기회가 닿는다면 <폴 클리퍼드>와 <룩우드> 같은 뉴게이트 소설을 직접 번역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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