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 사전
김소연 지음/마음산책·1만4000원
김소연(사진) 시인의 <한 글자 사전>은 그의 전작들인 <마음사전>(2008)과 <시옷의 세계>(2012)에 이어지는 작업이다. 시인이란 무엇보다 말을 다루는 이들이어서 거개가 낱말의 의미와 형태, 뉘앙스와 맥락에 예민하게 마련이지만, 김소연 시인은 특히나 그런 편이다. 마음을 다룬 낱말들(<마음사전>)과 시옷 및 쌍시옷 낱말들(<시옷의 세계>)에 이어 ‘감’에서 ‘힝’까지 한 글자로 된 낱말 310개를 수습한 <한 글자 사전>에서도 시인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언어 감각을 만날 수 있다.
“실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서 두려운 자. 어쩌면 ‘너’의 총합일 뿐인 자.”(‘나’)
“가변성 가족 혹은 확장형 가족. 친구와 적 사이를 간단하게 오가는 타인. 아주 가끔씩 드물게 ‘나’와 완전하게 겹쳐 기뻐지는 사람.”(‘너’)
국어 교과서에서 먼저 ‘나, 너, 우리’를 익히는 초등 신입생처럼 이 책의 독자들 역시 ‘나’와 ‘너’에 대한 시인의 풀이를 통해 <한 글자 사전>의 세계로 들어가볼 수도 있겠다. 그토록 확고하고 막강해 보이는 일인칭 주체란 실은 존재 자체가 매우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인칭에 의존하는 ‘불완전명사’일지도 모른다. 이인칭이란 친구와 적 사이라는 광활한 좌표 위에 놓인 존재인데, 드물게는 일인칭을 가능하게 하고 아예 일인칭과 포개지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인간이란 관계의 존재이며, 그 관계는 가능성과 불안을 더불어 안고 있다는 인식이다.
“가장 순정한 말은 오로지 한 음절로 이루어진 감탄사다. (…) 가장 허망한 말은 사랑을 맹세하는 말이지만, 그 허망함은 너무도 허망한 나머지 이상하고 야릇한 굳건함이 있다. (…) 그러나 정작 가장 무서운 말은 정확한 말이다.”(‘말’)
순정해서 간절한 말이 있고, 허망함에도 굳건한 말이 있으며, 약해 보이지만 강한 말이 있다. 말을 하는 매 순간 우리가 자신이 하는 말을 의식하고 반성하기는 어렵겠지만, 말에 관한 시인의 통찰을 이따금씩이라도 곱씹다 보면 언어 생활이 한결 순조롭고 원활해지지 않을까.
“인간의 한 생은 ‘생’일 수밖에 없다. 익지 않거나 익히지 않은, 엉뚱하고 공연한, 본디 그대로의, 지독하거나 혹독한 것일 수밖에 없는.”(‘생’)
동음이의어는 낱말과 낱말의 만남 또는 충돌로 뜻밖의 울림과 효과를 자아낸다. 생(生)이라는 한자어는 탄생에서 죽음까지 한평생을 가리키는 동시에 ‘날것’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회로 대표되는 날음식은 신선한 풍미를 자아내기도 하지만, 거칠고 야생적이어서 먹는 이를 힘들게도 한다. 연습이나 적응의 시간 없이 곧바로 ‘실전’에 투입되는 우리네 생이 바로 그런 날음식의 양면성을 지녔다.
“첫사랑은 두 번 다시 겪을 수 없다. 첫째도 복수형이 될 수 없다. 첫인상도 첫 만남도, 첫 삽도 첫 단추도 첫머리도 두 번은 없다. 하지만 첫눈은 무한히 반복된다. 해마다 기다리고 해마다 맞이한다.”(‘첫’)
‘첫’이란 일회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것이어서 소중하고 안타깝다. 그런데 첫눈만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해마다 되풀이된다. 반복되는 ‘첫’이란 형용모순을 피하기 어렵겠지만, 실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것이랴. 올해의 첫눈을 놓쳤더라도 내년의 첫눈이 기다리고 있으니 낙담하지 않아도 된다. 말도 그렇고 삶도 그렇다. 느슨함과 허술함이 때로 우리를 구원한다.
최재봉 기자, 사진 마음산책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