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람 지음/행성B·1만5500원 바야흐로 ‘피의 대화’가 곳곳에서 폭발하고 있다. 더럽거나 불경하거나 부끄럽게 여겨지던 피. 쓸모가 중하지만 너무나 고통스러운 피. 생리를 둘러싼 대화 말이다. 2015년 4월 키란 간디(Kiran Gandi)라는 26살의 뮤지션은 생리용품을 구입하지 못하는 저소득층 현실을 알리기 위해 생리용품을 착용하지 않고 런던 마라톤을 완주했다. 이듬해 미국에선 탐폰에 부가가치세를 매기는 세법 개정안을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고, 같은 해 7월 뉴욕시의회는 무상 생리대를 지급하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올초엔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으로 악명 높은 인도에서 질 좋고 값싼 생리대를 만드는 ‘용접공 남편’을 다룬 영화 <패드맨>이 극장에 걸린다. 한국도 변화의 물결에 올라탔다. 생리에 관한 금기를 깬 김보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가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이참에 김 감독은 영화에서 다 못한 얘기를 모아 책을 펴냈다. <생리공감>. 생리는 지구인의 절반이 평균 35~37년 동안 맞닥뜨리는 일상이다. 여성들은 대략 1년에 500㎖의 피를 흘리는데 이를 평생 모으면 16ℓ에 이른다. 여성이 피를 흘려야 인류가 존속 가능했음에도, 생리는 늘 천대받았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리아가 ‘성모’인 까닭은 불경한 피(생리혈)가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고, 불교에선 여성이 생리나 출산 중 흘린 피로 강물을 오염시킨 죄를 용서받기 위해 <혈분경(血分經)>을 읊도록 했다. 21세기에도 생리혐오는 계속된다. ‘하이힐 여성’이 앉았다 일어난 지하철 좌석이 피로 흥건하게 젖은 사진이 인터넷에 떠돌며 ‘똥이나 오줌처럼 조금만 참으면 될 일’을 견디지 못한 여성들의 ‘무책임함’을 비웃는다. 김보람 감독은 ‘생리충’이라는 말에 주저앉아 상처받는 대신, 생리의 역사를 훑고 할머니·엄마·이모·친구들로부터 생리 이야기를 수집하며 대안을 찾아 나선다. 달콤함은커녕 날카롭기만 했던 첫 섹스, 가슴이 작아서 남자친구에게 한없이 ‘미안’했던 경험 등 자신의 ‘몸 역사’를 드러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김 감독이 먼저 부숴야 할 것은 생리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었다. 한 남학생은 생리컵이 뭔지는 알아도 오줌이 나오는 요도와 생리혈이 나오는 질이 따로 있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모르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엔 ‘처녀막’이 훼손될까봐 성경험 이전엔 질에 손을 넣어선 안 된다는 오해가 굳건했다. 여성들이 생리 때문에 얼마나 ‘빡세게’ 사는지 남자들은 짐작조차 못했다. 한 여성감독은 <피의 연대기> 개봉을 앞두고 “남자들이 좀 불편해할 것 같다”는 말을 툭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둘러보니 여성들의 고군분투는 여러 대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해면·면·극세사·울 등 선택할 수 있는 생리대나 탐폰의 소재가 매우 다양했다. “이브의 탄생만큼 해묵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는 선언과 함께 1930년대 선보인 생리컵은 많은 여성들에게 자신의 몸을 잘 알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했다. 김 감독의 네덜란드 친구들은 ‘생리 안 할 권리’를 위해 자궁에 장치를 삽입하는 시술(IUD)이나 팔뚝에 얇은 칩을 박아 호르몬을 조절하는 임플라논 시술을 받기도 했다. 김 감독은 생리를 탐구하면서 자신도 변화했다고 한다. 영화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날 무렵, 어느날 거울에 비친 작은 가슴이 귀엽고 예쁘고 개성있게 느껴진 것이다. 자신의 몸을 긍정하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 ‘생리공감’이 준 선물이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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