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통치-현대 자본주의의 공리계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지음, 허경 옮김/갈무리·1만8000원
<부채인간>(2012)에서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부채(빚)를 통해 스스로를 유지하고 확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던 이탈리아 출신 사회학자·철학자 마우리치오 라차라토(63)는 2013년 <부채통치>라는 저작에서 부채를 테마로 삼은 나름의 자본주의 분석을 좀 더 종합적으로 벼려냈다. 2007년 금융위기 이후 전 지구적으로 공공부채가 불어나고 각 정부가 긴축재정을 강행하며 그 부담을 서민·대중에게 떠넘겼던 현실이 ‘부채 2부작’의 주된 배경이다. 인간은 빚을 갚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부채인간’이 되었는데, 자본주의는 왜, 어떻게 이런 지경을 만들었는지가 지은이의 주된 탐구 대상이다. 지은이는 들뢰즈·가타리의 자본주의 분석과 푸코의 ‘통치성’ 논의를 주로 참고하여, 자본주의의 역사적 궤적과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을 풀어내고 그 핵심적인 작동 원리를 밝히려 시도한다.
비물질노동, 생명정치 등의 주제들을 파고들어 온 이탈리아 출신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마우리치오 라차라토. 출처 위키피디아.
먼저 지은이는 “2007년 이후 새로운 거대 전유·징발 방식이 작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위기 이후 ‘지속가능한 성장’이란 신화는 무너졌고, 불평등은 더욱 급격히 확산됐다. 복지를 줄이고 긴축재정에 나선 국가는 대다수 서민을 ‘부채인간’으로 만들고, ‘책임 없는’ 그들로부터 거둬들인 것(세금)을 ‘책임 있는’ 권력에게 분배했다. 이것이 작동하는 방식을 명확히 파악하려면, 자본주의에 대한 기존의 ‘경제학’적인 접근에서 탈피해야 한다. 지은이는 ‘반동 사상가’ 카를 슈미트의 관점을 빌려, 자본주의가 궁극적으로 “경제가 아닌 정치“라는 것을 지적한다. 자본주의는 생산을 중심으로 놓는 경제의 체제가 아니라, “점유하고 분배하고 생산하는” 것을 규정하는 힘을 그 중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정치의 체제다.
2007년 금융위기를 겪은 뒤 각 국가들은 복지를 삭감하고 긴축재정에 돌입했다.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탈영토화’ 과정에서 서민·대중들은 ‘부채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라차라토의 진단이다. 출처 게티이미지.
들뢰즈·가타리의 논의를 뒤쫓아, 지은이는 이윤과 금리, 세금을 자본주의의 “세 가지 포획 기구”라고 본다. 1960년대까지의 이른바 ‘산업자본주의’에서 이윤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서서 소유권과 권력관계를 규정하는 포획 기구였다면, 신자유주의의 도래 이후 금융자본주의 시대에는 금리가 가장 중요한 포획 기구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어 신자유주의가 ‘위기’에 처한 국면에서는 세금이 가장 중요한 포획 기구가 된다.
문제는 이런 궤적 속에서 자본주의의 ‘탈영토화’가 결국 모든 사회관계 전체로 확장된다는 사실이다. 한때 대립하는 관계로 인식됐던 국가와 시장, 정치와 경제, 경제와 사회, 사회와 자본 등은 서로 착종되어 간다. 그 위에서 자본주의는 ‘위기’ 국면을 기화로 삼아 입맛에 맞지 않은 것들만 파괴하고 입맛에 맞는 새로운 사회 모델을 활성화시킨다. 그 모델은 어떤 것인가? 단적으로 말해, 자본의 근간인 ‘사적’ 소유권을 지키기 위해 ‘공적’인 국가가 부채를 지고, ‘공적’인 세금을 통해 그 상환을 구성원들에게 떠넘기는 모델이다.
월스트리트 점거운동 주체들이 발간한 <타이들>이란 잡지의 표지. 저항 세력의 손에 ‘부채’라고 적한 불꽃이 들려있다. 출처 플리커.
얼핏 생각해봐도 이해하기 힘든 이런 모델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실현 가능했는지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은이는 자본으로서의 화폐의 성격, 푸코의 ‘통치성’ 논의, 들뢰즈·가타리의 ‘공리계’ 논의 등을 나름의 관점으로 종합해낸다. ‘공리계’란 어떤 한 형식체계를 관통하는 원칙 또는 명제들의 집합인데, 예컨대 “세계무역기구가 각 국가에 세부적 국가 의제를 제쳐놓고 기업의 이윤 창출을 용이하게 만드는 규칙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세계화의 공리계다.”(이언 뷰캐넌) 이런 관점을 빌려오면, ‘사회적 공리계’로서 자본주의가 변화하는 현실에 직면해 그 핵심을 포획하고 재조직화·재구조화하는 맥락이 포착된다. “위기의 시기, 곧 소유권이 위협받는 시기에 자본은 흐름들을 공리계에 종속시키고자 시도하며, 이러한 시도가 실패할 경우 흐름들을 파괴해 버린다.”
자본주의는 다양한 통치·전유를 구사할 수 있는 권력관계의 장인 금융과 통화를 중심으로, 더욱 단순하면서도 권위적인 재조직화, 재구조화에 매달린다. 이제 과거 ‘사회국가’를 지탱해온 복지국가는 파괴의 대상이 되고, 그 중심이었던 노동-자본의 관계는 새로운 자본주의가 중심으로 삼는 채무-채권의 관계에 종속된다. 근대 권력의 통치성이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면,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부채를) 지불하면 살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죽을 것”이 새로운 통치성으로 대두한다. “신자유주의와 부채 위기가 우리에게 난폭한 방식으로 상기시키는 것은 이런 정치적 현실이다.”
2011년 스페인 마드리드의 은행 현금인출기 앞에 ‘유죄!’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붙어있다. 출처 플리커.
지은이는 “부채의 지배관계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는 것은 지불행위(경제)가 아니라, 정치적 행위, 곧 거부”라고 말한다. 책의 마지막 단락에서는 “게으른 행동은 화폐를 유일한 목적으로 삼으면서 그 과정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 자본주의적 생산행위의 대척점에 존재한다”며 “노동의 거부에서 다시 출발하자”란 제안도 내놓는다. 구체적인 대안으로 삼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다만 ‘자본의 작동 원리를 실재적으로 파악한 뒤에야 이를 실재적으로 해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은이의 분석은 충분히 값지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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