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와 흙-후쿠시마, 죽음의 땅에서 살아가다/신나미 교스케 지음, 우상규 옮김/글항아리·1만5000원
도쿄 최후의 날-핵의 수호자들, 전쟁과 대재앙의 숨은 조종자/히로세 다카시 지음, 최용우 옮김/글항아리·1만6000원
꼭 7년 전 일이었다. 2011년 3월11일 오후, 와타나베 후미카즈가 외양간에서 슬슬 작업을 시작하려는 순간, 맹렬한 흔들림과 함께 양철 지붕에서 쾅쾅 울리는 굉음이 들려왔다. 소들은 이상한 울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구모…우웃…우오온…. 발정할 때나 배고플 때가 아닌, 뱃속에서 짜낸 신음처럼 두려움에 떠는 소리, 인간에게 포획될 때처럼 궁지에 몰렸을 때의 울음소리 같았다.(신나미 교스케, <소와 흙> 중에서)
이날 일본 동부 연안에서 불과 70㎞ 떨어진 태평양 해저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높이 14m가 넘는 거대한 쓰나미(지진해일)가 일본 본섬(혼슈)의 북동부 도호쿠 지역을 덮쳤다. 3월 한달새에만 수백 차례의 여진이 함께 몰아닥친 동일본 대지진이다. 해안 마을들을 강타한 직접 피해보다 더 심각한 건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의 원자로 4기가 잇따라 폭발하면서 엄청난 양의 방사능 물질을 뿜어낸 초대형 원전 사고였다. 쓰나미와 원전 폭발로 숨지거나 실종된 사람만 1만8000여명. 방사능 누출과 피폭에 따른 인명 피해, 그리고 환경오염과 방사능 생체 축적에 따른 장기적 피해 규모는 어림조차 할 수 없다.
쌍둥이 형제 소 ‘야스이토마루’(오른쪽)와 ‘야스이토마루 2호’(왼쪽)는 2010년 후쿠시마현 나미에정 오마루에 있는 와타나베 후미카즈의 외양간에서 태어났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후 ‘귀환 곤란 구역’으로 지정된 이곳에서, 이 두 마리의 소는 와타나베의 돌봄을 받으며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사진 글항아리 제공
다시 7년 전 그날. 후쿠시마현 사람들은 너나없이 공포에 질려 황급히 피난길에 올랐다. 대부분은 물도 음식도 없었다. 전기와 통신망과 도로 곳곳이 끊기고 모든 휘발유가 바닥난 하늘 위로 ‘죽음의 재’(초고농도 방사능 구름)가 몰려왔다. 세계의 원자력 신디케이트들도 더는 방관만 할 수 없었다. 열흘 뒤, 국제 방사선 방호위원회(ICRP)는 방사능 패닉 상태를 가라앉히려, 일본 정부에 연간 방사능 피폭 한계치를 기존의 1밀리시버트에서 20~100밀리시버트로 높이라고 권고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던 일본 정부는 기준치를 20배나 올렸다.(히로세 다카시, <도쿄 최후의 날> 중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1945년 원자폭탄 피폭과 함께 일본뿐 아니라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핵재앙으로 기록됐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7년을 맞아, 원자력 기술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권력과 자본의 불편한 진실을 되짚고, 인간을 포함한 뭇생명의 의미를 성찰하게 하는 두 권의 책이 번역돼 나왔다.
<소와 흙>은 일본의 논픽션 작가 신나미 교스케가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린 후쿠시마 일대를 떠나지 않고 소들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농민들의 이야기를 4년간 추적한 르포 기록이자 뛰어난 ‘동물 문학’이다. 원전 사고가 나자 일본 정부는 반경 20㎞ 내 모든 가축의 안락사를 지시했다. 하지만 주민들 사이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도 소를 계속 키우겠다”, “내 몸의 피폭은 내가 감수하겠다”, “방치된 가축 돌봄은 우리 늙은 수의사들의 몫이다”…. 축산농들의 뜻은 단호했고, 정부는 당황했다. 지진 후 2년이 지나도록 소 포획과 안락사가 계속되면서, 소들도 ‘흰옷 집단(방호복을 입은 안락사 집행자)’을 두려워하고 피했다. “안락사의 위험을 감지한 소는 아무리 먹음직스런 먹이를 놔둬도 포획용 울타리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흙에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염되기 전까지 “고향에서 ‘살아’ 있으면서 초목을 기르고 동물의 거처가 돼주었던” 생명의 토양이었다.
2012년 6월 일본 도쿄의 총리 관저 앞에서 시민 2만여명이 후쿠이현 오이 원전 재가동과 원자력의 군사적 이용 가능성에 문을 연 원자력기본법 개정 방침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시민들이 손에 든 “오이 원전 재가동을 철회하라”는 구호가 선명하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농민들은 정부와의 끈질긴 협상 끝에, 소들을 오염지역에 남겨둔 채 일주일에 한두 차례 보살피러 드나들 수 있게 됐다. 방사능 피폭은 본인의 책임이었다. 사회적으로 따가운 시선은 물론이고, 농민들끼리도 의견이 달라 서로 마음에 생채기를 남겼다. 사람들이 사라진 초원에서 소는 스스로 교배해 새끼를 낳고 적응해 살아가기 시작했다. 가축인 소들이 차츰 야생화했고 몸에는 방사능이 축적돼 갔다. 지은이가 책을 집필하던 2015년 초 경계구역의 소 3500마리 중 1747마리가 안락사 처분됐지만, 소유자가 동의하지 않아 계속 사육하는 소도 550마리나 됐다.
‘희망의 목장 후쿠시마’의 요시자와는 소를 계속 키우며 함께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를 “소와 함께 피폭의 산 증인, 이야기꾼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의) 경제적 가치는 사라졌지만 소를 버리거나 죽어가는 걸 바라보기만 하진 않을 것이다. 방사능에 오염된 먹이가 섞여 있어도 소들은 매일 맛있게, 기쁜 얼굴로 먹어주겠지. (…) 여기서 소를 사육하면서 경험한 것, 실제로 일어난 일을 살아 있는 목소리로 전하는 것이 나의 남은 20년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평화활동가이자 논픽션 작가인 히로세 다카시는 <도쿄 최후의 날>에서 ‘핵의 수호자들, 전쟁과 대재앙의 숨은 조종자들’(책의 부제)의 민낯과 정치-관료-경제-학계가 촘촘히 연결된 이익동맹의 실체를 폭로한다. 자본이 원자력의 수익성에 주목한 건 이미 120년 전이다. 1890년대 말 앙리 베크렐이 우라늄의 방사능을, 퀴리 부부는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했다. 그러자 유럽 금융을 지배하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라듐 제조소를 차리고 우라늄 광산까지 지배하면서 거대 카르텔을 형성한 것. 1929년 미국 대공황 이후 천문학적인 부를 장악한 록펠러와 모건, 두 집안은 1940년대에 미국 정부가 추진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원자폭탄 제조에 직접 참여한 웨스팅하우스, 듀폰, 제너럴일렉트릭스(GE)가 이들 가문의 손아귀에 있었다.
1952년 11월 미국이 태평양 마셜제도의 에네웨타크 환초에서 사상 첫 수소폭탄 실험을 한 직후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있다. 이듬해에는 소련도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면서, 미-소 핵대결이 인류의 미래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위키피디아
맨해튼 프로젝트에는 ‘방사능 인체 실험’도 포함됐다. 의학 전문가들은 중상 또는 말기 암 환자들에게 플루토늄을 주사했고, 하버드대는 지적장애아들에게 우유나 음식물에 방사성 물질을 넣어 먹였다. 1960년대에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무기징역수 131명을 대상으로 대량의 방사선 실험을 했다. 앞서 1953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창설도 그 직전 미국과 소련이 잇따라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한 뒤 미국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내세워 후발국들의 핵개발을 막고 상업적인 원자력발전 시대를 주도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일본이 재처리를 요청한 사용후핵연료에서 추출한 플루토늄은 프랑스에서 핵무기 제조 및 실험용으로 빼돌려졌다.
지은이는 책에서 “또다른 대지진”, “일촉즉발의 상황”을 경고하며 원전 중단을 촉구한다. “일본 최대 활단층이 움직인다면 가고시마현 센다이 원전과 에히메현 이카타 원전이 일격에 박살나면서 일본은 파멸할 것”이다. 그는 “일본에 사는 사람들이 희망과 절망이라는 커다란 선택의 기로에 있다”며 “전 지구적 규모의 우라늄 경제 순환 고리를 끊어낸다면 (…) 원전을 근절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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