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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살았던 연해주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다

등록 2018-03-08 19:41수정 2018-03-08 19:53

페치카 최재형
박환 지음/도서출판 선인·2만6000원

사실, 조국은 그를 위해 해준 게 없었다. 아버지는 함경북도의 머슴이었고, 어머니는 “노래와 춤으로 고위 인사들을 즐겁게 해주며 밥벌이를 했다”. 조선은 사회적 천대와 절대빈곤만을 남겨줬음에도, 그는 동포와 조국을 잊은 적이 없었다. <페치카 최재형>은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너른 견문, 따뜻한 인간성, 뜨거운 애국심으로 한평생을 살았던 최재형에 관한 이야기다.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사진과 최재형 자손들의 증언과 기록 등을 토대로 최재형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1869년 9살 나이에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던 최재형은 친절한 러시아 선장의 도움으로 선원이 돼 너른 세상을 경험하고, 이후 연해주로 돌아와 군수업 등으로 부를 일궜다. 러시아에 귀화해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가 된 그는 그저 순탄한 삶을 좇을 수도 있었으나, 재산을 털어 의병 활동을 지원했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도 그의 전폭적인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인간미에 감화받은 이들이 ‘페치카(러시아 난로) 최’라고 별명을 붙여줬을 만큼 동포들의 신뢰가 깊었던 그는 1920년 4월 일제의 연해주 한인 학살 참변에 휘말려 안타까운 죽음을 당했다. 이후 러시아에 남은 11명의 자녀들 역시 대부분이 1930년대 스탈린정권에서 각종 죄목으로 처형되거나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했다. 가족의 비극을 회고하면서 최재형의 아들 ‘최 발렌틴 페트로비치’는 “역사가 아무리 가혹했다 할지라도, 산 자이든 죽은 자이든 모든 사람은 각각의 존재의 의미와 진실에 대한 완전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최재형을 왜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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