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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다수의 세계가 있을 뿐 하나의 대안은 없다

등록 2018-03-08 19:58수정 2018-03-08 20:10

월터 미뇰로의 ‘탈식민’ 담론
근대성 뒤에 감춰진 식민성 비판
서구 중심의 인식적 헤게모니 분석
‘대안’ 아닌 ‘선택’이 만드는 미래
서구 근대성의 어두운 이면-전 지구적 미래들과 탈식민적 선택들
월터 미뇰로 지음, 김영주·배윤기·하상복 옮김/현암사·2만5000원

1500년대까지 지구란 행성의 질서는 복수-중심적이며 비자본주의적이었다. 다른 문명을 잠식하는 하나의 거대 문명이 없었다는 얘기다. 유럽 문명이 이른바 ‘신대륙’을 발견하면서부터 비로소 하나의 중심을 가진 자본주의적 세계 질서가 만들어졌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작업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듯 서구 문명은 이런 궤적을 ‘근대성’이란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해왔지만, 오랫동안 그것이 사실은 ‘식민성’과 한 몸이라는 것은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근대성과 식민성이 한 몸이라는 획기적인 지적은 199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페루 출신 아니발 키하노, 아르헨티나 출신 엔리케 두셀, 월터 미뇰로 등이 그 선두를 맡은 학자들로, 이들은 ‘근대성/식민성/탈식민성’이란 이름의 공동연구그룹을 꾸리고 관련 논의를 넓히고 발전시켜왔다. 이 가운데 월터 미뇰로(77) 미국 듀크대 교수의 2011년 저작 <서구 근대성의 어두운 이면>이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미뇰로는 무엇보다 ‘근대성/식민성’(근대성과 식민성이 한 몸이란 것을 지적하고, 이 지적이 발화된 장소를 가리키기 위해 두 단어 사이에 빗금을 친다)이 토대로 삼고 있는 지식 체계와 인식의 구조를 밝혀내고 이를 극복하는 실천의 큰 방향까지 검토한다는 점에서 탁월한 학자로 평가받는다. 이 책은 전작인 <르네상스의 어두운 이면>(영문판 1992년), <지역의 역사들/전지구적 구상들>(영문판 1999년, 국내에는 <로컬 히스토리/글로벌 디자인>으로 출간)과 ‘의도치 않은’ 3부작을 이루며, ‘탈식민성’이란 중심 주제가 이들을 관통한다.

월터 미뇰로는 아니발 키하노, 엔리케 두셀과 함께 9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제기된 ‘탈식민’ 담론을 대표하는 지식인이다. 국내에서는 그의 저작 세 권이 번역 출간됐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월터 미뇰로는 아니발 키하노, 엔리케 두셀과 함께 9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제기된 ‘탈식민’ 담론을 대표하는 지식인이다. 국내에서는 그의 저작 세 권이 번역 출간됐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탈식민’이란 말의 이미지 때문에 미뇰로와 공동연구그룹의 작업을 서구중심주의 또는 제국주의를 깨부수는 ‘대항 담론’ 정도로 여겨선 곤란하다. 근대성/식민성 아래 놓인 전지구적 현실을 포착하고 이를 극복할 길을 새롭게 모색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사유는 오늘날 가장 근본적인 변화와 실천을 요구한다고 평가받는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지은이는 “탈식민성의 과업과 목표는 저항하기, 아니면 오로지 저항하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주로 ‘다시-존재하기’와 관련한 것”이라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지은이는 “근대성의 수사학과 식민성의 논리가 ‘식민적 권력 매트릭스’의 두 측면”이라고 말한다. 거칠게 풀이하자면, 근대성은 전체 인류의 좋은 삶을 기치로 내걸고 전개(근대성의 수사학)됐는데, 그것은 어떤 지식 체계를 앞세워 다양한 주체들을 통제하는 과정(식민성의 논리)에 기대어 작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대변되는 서구 문명의 인식론이 단 하나의 보편성만을 세우고 여기에 맞지 않는 다른 것들을 식민화해온 과정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콜롬비아 철학자 산티아고 카스트로-고메스는 서구 중심주의적 인식론을 ‘영도의 오만’이라고 비판했는데, 이것은 언제나 시간에 있어서는 ‘현재’에, 공간에 있어서는 ‘중심’에 자신을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보편적 관찰자인 양 세계지도를 내려다보며 각 지역에 살아가고 있는 ‘지리-역사적 몸’의 위치들을 은폐하고 그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인식적 헤게모니가 나온다. ‘영도의 인식’에 충실한 ‘후마니타스’(문명인)가 ‘안트로포스’(야만인)에게 동화를 요구하고, 동화하지 않은 자들을 추방한다. 이것이야말로 실제로 보편을 앞세운 서구 세계의 팽창으로 비서구 세계가 겪었던 공통의 경험이다.

종속이론 연구 과정에서 ‘식민성’이란 개념을 선구적으로 제시했던 페루 출신 사회학자 아니발 키하노.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종속이론 연구 과정에서 ‘식민성’이란 개념을 선구적으로 제시했던 페루 출신 사회학자 아니발 키하노.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역설적으로 그 공통의 경험으로부터 단 하나의 보편을 거부하는 ‘다원보편적’인 미래들이 탄생한다. ‘후마니타스’는 자신을 영도에 두는 인식적 특권에 빠져 있지만, ‘후마니타스’의 지식을 전유한 ‘안트로포스’는 그것이 단지 ‘후마니타스’에 의해 통제되는 허구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실체를 드러낸다. 이제 영도의 오만이 은폐해왔던 온갖 ‘지리-역사적 몸’의 장소들이 새로운 보편으로 등장한다. 지은이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비틀어, 이를 “내가 생각하는 곳에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로 압축한다. ‘탈식민적 사유’가 근대성의 수사와 식민성의 논리를 대체하고자 제시된 것이다. 지은이는 탈식민적 사유의 실마리를 제시하는 사례로 알제리 출신 말릭 벤나비, 아르헨티나 출신 로돌포 쿠시, 아프로-카리브 출신의 실비아 윈터의 사상을 짚어보기도 한다. “탈식민성의 주요 목표는 (…) 식민적 권력 매트릭스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 질서 안에서 한자리를 차지하려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리 끊기’(delinking)를 하는 것이다.”

‘해방철학’의 창시자로 손꼽히는 아르헨티나 출신 철학자 엔리케 두셀.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해방철학’의 창시자로 손꼽히는 아르헨티나 출신 철학자 엔리케 두셀.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무엇보다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대안’이 아니라 ‘선택’을 말하는 대목이다. 지은이는 오늘날 세계 정세를 다섯가지 궤적으로 풀이하는데, 각각 ‘재서구화’(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 복구 시도), ‘좌파의 새 방향 설정’(재서구화에 대한 대응), ‘탈서구화’(동아시아·동남아 중심의 탈인종주의), ‘탈식민적 선택들’(탈식민성), ‘영성적 선택들’(종교의 탈식민화) 등이다. 지은이의 논의는 이중 ‘탈식민적 선택’과 관련이 깊은데도, 그는 이것을 다른 궤적보다 우위에 있는 ‘대안’이라 주장하는 대신 단지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선택’해야 할 문제라고 강조한다. 근대성/식민성의 뿌리로서 단일 논리에 근거를 두는 서구 중심적 보편 개념을 비판하면서 “공통의 보편적 프로젝트로서 ‘다원보편성’을 모색하겠다”는, 쉽게 말해 “다수의 세계들이 공존하는 미래 세계”를 지향하는 지은이의 독특한 사유가 깊이 반영된 대목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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